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9:09:43

면제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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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면제갑옷 한국광복군 군복

파일:external/www.kjclub.com/508-dryice12.jpg 파일:external/www.ntmnews.co.kr/1283491567-52.jpg
복원품 오른쪽이 면제배갑의 착용 사진. 왼쪽은 두정갑.
1. 개요2. 실제 유물3. 창작물에서4. 기타

1. 개요

綿製背甲

파일:external/i.jjang0u.com/123711531530071.jpg

조선흥선 대원군지갑의 재질을 무명천으로 바꿔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갑옷 또는 방탄복.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갑병이 연상된다. 이름은 면(綿)제 배갑인데 사실 목화가 아니라 삼베로 만들어졌다.

병인양요를 치른 후, 왜란 때 일본군이 쓰던 조총과는 비교도 안되는 서양의 소총의 무서운 위력을 실감한 대원군은 전력 증강을 위하여 여러가지 신병기 개발에 노력했다. 이 무렵에 김기두(金箕斗)와 안윤(安潤)이 고안한 것인데 조총으로 실험한 결과, 12겹의 삼베를 겹치자 총알이 뚫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약을 위해 한 겹을 더 추가하여 총 13겹으로 채택하였다.

비록 개발과정이 원시적이며 과학적인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은 아니지만, 질긴 섬유를 사용하고, 여러 겹의 섬유를 겹쳐서 탄환의 운동 에너지를 받아내는 원리 자체는 현대의 방탄복과 동일한 것이다.

이전에도 방탄복에 대한 개념과 실험은 여럿 있었다. 우르비노의 공작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밀란의 갑옷 장인에게 방탄조끼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고. 156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도 갑옷으로 방탄 여부를 실험하기도 했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올리버 크롬웰의 기병대인 철기대의 갑옷 또한 총알의 대미지를 일부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Bulletproof(방탄)라는 말 자체도 15세기 후반에 이미 생긴 것으로 보인다.[1]

직물의 질김을 이용해서 탄환의 관통력을 저지한다는 개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개념이고, 다른 나라의 경우 가장 방탄목적으로 흔하게 사용되던 직물은 비단이다. 질김(인장력)이 다른 직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 대표적으로 삼국지관우의 상징인 녹색 비단 전포는 장식용이 아니라 전장에서 화살을 방어하기 위해 받쳐 입었던 것이고, 중세 몽골군은 비단조끼를 전투시 입고 나갔는데 화살을 비단옷을 뚫지 못했기에 실제 화살에 맞았을 경우, 화살촉은 몸속으로 파고들지 못했고 대신 비단을 당김으로써 손쉽게 화살촉을 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기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뀐 이후에도 비단은 방탄 목적으로 잘 쓰였는데, 예를 들어 권총으로 결투할 때, 비단갑옷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실전에 쓰인 17~18세기 비단갑옷(Silk Armour)유물은 현재 박물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면제배갑은 비단의 비싼 가격 때문에 삼베가 쓰인 것이고 삼베의 인장력은 비록 비단의 인장력에는 미치지 못했겠지만 이는 삼베를 비단보다 훨씬 많이 겹쳐있는 것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이고 비단갑옷과 달리 면제배갑의 경우, 몸이 불편할 정도로 두툼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삼베의 부족한 인장력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면제배갑의 큰 단점은 천을 여러 겹 겹치는 제작법 특성상 착용시 상당히 더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더위를 아예 신경쓰지 않은 건 아닌지라 양 옆에 트임을 주는 등 통기성이나 더위 같은 측면을 신경 쓴 모습이 없진 않다. 다만 아무리 트임을 줘 봤자 면제 투구까지 써 버리면 그야말로 쪄 죽을 지경이었던지라 찜통인건 여전했다. 신미양요 기록 사진을 보면 조선군의 시체가 면제배갑과 세트로 되어 있는 면제투구보다는 전립을 쓴 모습이 대부분이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에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미니에 탄을 넘어 금속 탄피를 쓰는 후미장전식 소총이 등장하기 시작한 서양식 화기를 막는데 한계가 있었다.

면제배갑이 솜으로 만들어져서 총을 쏘았을 때 마찰력으로 인하여 갑옷에 불이 붙었다는 말이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삼베옷으로 만들었고 총에 맞아서 불이 붙는 일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위의 개발 당사자들과 조선군이 제식 채용하면서 수 차례는 족히 실용적인지 실험했을텐데, 총탄이 접촉하는 순간에 불이 붙는 갑옷을 만드는 것이 더 힘들고, 사용할 리도 없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배갑에 포탄 파편으로 튀어 불이 옮겨붙은 것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미군이 신미양요 때 면제배갑을 하나 건져갔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면제배갑 유물이며,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미군은 신미양요에서 이 방탄복의 활약이 남긴 인상이 강했는지, 1893년 시카고 엑스포에서 한국관(한옥을 지어서 참가)의 메인 전시품이 이 면제배갑 세트(몸체 갑옷 + 투구)였다.

2010년 2월 KBS 특집 프로그램 시간 여행에서 실물을 토대로 면제배갑을 복원했다. 무겁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무게는 매우 가볍다고 하며, 실제 복원한 물건은 불과 3.5킬로그램에 불과했다.[2][3] 참고로 오늘날 쓰이는 방탄재 꽉 채워넣은 풀 바디아머류의 무게가 14kg이다. 또한 단점으로 기록된, 형태상 착용시 겨울이 아니면 매우 덥다는 점도 입증되었다고 한다. 이 문제는 현대의 군용 방탄복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아직 방어력과 열피로의 반비례 관계는 해소하지 못했다.

실제 성능이 어땠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상술한 예능 프로에서 실험을 하긴 했는데, 실험군이라는게 경기용 공기총에 쓰는 연지탄과 국궁에 쓰는 연습용 화살 정도였다. 심지어 면제배갑 마저도 제대로 고정하거나 그런건 아니다.[4]

북한에선 제2연평해전 이후 함정 승조원용 방편(탄환을 막는 방탄이 아니고, 폭발로 생기는 파편을 막아내는 용도)복으로 목화솜을 쑤셔넣은 방호구를 지급하는데, 만드는 방식은 좀 달라도 노리는 효과나 입으면 겁나 더운 점은 이거랑 똑같다.

2. 실제 유물

남아있는 유물이 꽤 있는 편인데,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1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1점링크,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 육사박물관에 1점이 소장되어있다. 워낙 실존유물이 많아서 가장 최근인 2019년 면제배갑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링크, 뉴욕이나 영국, 프랑스[5], 도쿄국립박물관, 미국 트란실베니아 대학교(Transylvania university)링크[6]등 전부 합해서 상의 6점, 투구6점, 요대 3점, 흉곽보호대2점 등이 세계 각지에 널리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ages.metmuseum.org/DT11934.jpg 파일:attachment/면제배갑/e0040264_4ab7809e30b4f.jpg
뉴옥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면제배갑.#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도 한 벌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갑옷의 형태는 총길이 85cm로 반령깃에 양 겨드랑이 부분은 깊이 파서 활동하기 편하게 했으며 또한 어깨의 좌측이 터져 있어 매듭단추가 달림으로써 입고 벗게 되어 있고 양쪽 옆의 트임에는 좌우에 2개씩 각각 앞뒷판으로 끈이 부착되어 매게 되어 있다. 또한 깃과 모든 테두리에는 같은 천으로 바이어스 처리를 곱게 하였으며 앞판의 좌우로 2개, 뒷판에 상하, 좌우로 2개씩 문양을 넣었는데 검은색으로써 도장을 찍거나 그려넣은 것처럼 보인다.

남아있는 면제배갑 유물 전부 갑옷 표면에 부적 문양이 있는데, 2019년에 이민정, 박경자, 안인실 등이 이 문양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한 바에 의하면[7], 유물별 보존상태 때문에 아직 모든 유물들에 있는 문양의 형태나 의미를 다 밝히지는 못하지만, 표본에 따라 불교의 옴마니반메훔 문양, 도교의 오악진형도(五嶽眞形圖), 명나라 무비지에 수록된 기문둔갑이라는 점술에서 사용되는 구성팔문부(九星八門符) 문양[8]이 세겨져 있다고한다.

이들 합동연구에 의하면 그 전의 연구에서는 이같은 문양들이 병사들이 생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개별적으로 미신이나 주술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국가적 가치관(성리학)과 무관한 불교나 도교의 것을 차용해 그렸다고 추정하였지만, 함께 그려진 구성팔문부 문양이 영조가 입수한 명나라 모원의가 작성한 무비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이 군권확립을 위해 차용한 우주론적 사고방식을 단순히 병사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급조해서 그렸다고 보기는 부자연스럽고, 또 투구에 그려진 오악진형도의 배치도 민화나 다른 중국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형태라는 점, 조선의 성리학이 송대의 주희나 영정조 때에 불교나 도교적 요소, 오행론을 차용했던 점 등을 보아 이들 문양들이 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조하고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세부적인 문양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서는 더욱 구체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3. 창작물에서

파일:attachment/면제배갑/e0040264_4ab7817560776.jpg 파일:attachment/면제배갑/e0040264_4ab78180d83ff.jpg 파일:attachment/면제배갑/e0040264_4ab7817f56120.jpg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에서 이 갑옷을 입고 방탄실험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시대적으로 옳은 장면이 아니며 면제배갑에 대고 쏘는 총 역시 반자동총으로 묘사된다. 아리사카는 볼트액션 소총이고 시기상 흥선대원군 부하들이 쓰는 것도 맞지는 않지만 뭔가 역사적 반영을 기대하면 안된다. 이 영화 자체가 개그물 비슷한 작품이다.
  • 구조가 직관적이고 재료도 구하기 쉽기 때문에 조선이나 인접국 배경 대체역사소설에서 실제역사보다 일찍 만들어지곤 한다.

4. 기타

이 내용을 2021년 4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다루었다.


[1] 사실 저 방탄(Bulletproof)란 단어 자체가 갑옷에 총을 쏴서 막아낸 자국에서 유래된 단어다. 판매 전에 직접 총을 쏴서 방호성능을 직접 증명하는 개념. 그래서 이 시기 플레이트 아머 유물에는 총알을 막아낸 자국이 품질을 인증하는 표식으로 취급되었다.[2] 단, 위의 경우는 면제배갑을 전신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투구와 흉갑이거나 흉갑만 착용한 경우라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섬유의 중량이 비교적으로 가벼운 것은 사실이다.[3] 하지만 위에도 언급된 스미소니언에 보관되어 있는 실물품은 흉갑만 6.2kg, 벨트부분이 499g, 투구는 1.86kg 정도로 확실히 무거운편이 맞다. 현대에서 재현하다 보니 재질이나 제작법상 차이가 생긴걸로 보인다.[4] 이미 17세기부터 서양에선 점점 증가하는 총기 화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각종 방탄 갑옷들이 도태된 것을 보면 당시 보병용 머스킷 상대로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5] 특이하게도 입수 경위가 병인양요 때 노획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앞의 연구에서는 '입수경위를 다시 면밀히 조사한다면,' 면제배갑 개발 경위도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고있다.[6] 신미양요 당시 미국이 노획했던 수자기의 한국 반환에서 활약했었던 한국 영남대에서 재직중인 토마스 드보네(Thomas Duvernay)가 촬영한 사진으로 신미양요때 전사한 휴 맥키중위가 전리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맥키중위의 증손자를 통하여서 대학에 기증하였다고 한다.[7] 이민정/박경자/안인실, <조선후기 면제갑주 문양에 대한 연구 2 ,2 : 문양의 상징적 의미와 해석을 중심으로>, 한국복식학회, 2019 ; 이민정/박경자/안인실, <조선후기 면제갑주 문양에 대한 연구 1 : 문양의 분석과 복원을 중심으로>, 2019, 한국복식학회[8] "구성팔문부는 기문둔갑에서 사용되는 부적이다. 기문둔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시공간의 기운을 활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점술이다." - 앞의 논문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