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0:11:46

용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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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전투
龍仁 戰鬪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2년 (선조 25년) 7월 13일 ~ 14일
(1592년 음력 6월 5일 ~ 6월 6일)
장소

경기도 용인
원인 삼남 지방 조선군의 한양 탈환 시도.
교전국 일본
(공세)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키자카 야스하루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키자카 사효에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와타나베 시치에몬
파일:와키자카 가문 문장.svg 마나베 사마노조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광 (전라도 순찰사)
파일:조선 어기.svg 곽영 (전라도 방어사)
파일:조선 어기.svg 윤국형 (충청도 순찰사)
파일:조선 어기.svg 김수 (경상도 순찰사)
파일:조선 어기.svg 권율 (광주 목사)
파일:조선 어기.svg 백광언 (前 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지시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이지례
병력 일본군: 1,600명 조선군: 50,000명 ~ 80,000명[1]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전사자: 1,000명
결과 일본의 승리
영향 * 조선 삼도근왕군(三道勤王軍) 붕괴
*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 본격화


1. 개요2. 전개3. 결과4. 논란
4.1. 삼도 근왕군의 병력 규모4.2. 전사자 수만 명 설
5. 여담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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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음력 6월 5일에서 음력 6월 6일 사이에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근처(현 광교신도시 부근)[2]에서 벌어졌던 전투다.

칠천량 해전과 함께 임진왜란 전투 중 조선이 가장 어이없게 실패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0여명의 군사로 무려 30배 ~ 50배가 넘는 5만 ~ 8만여명의 조선군을 와해시켰다.[3]

2. 전개

조선군은 한양이 함락당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崔遠),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 전라도 도사 최철견(崔鐵堅), 중조방장 이유의(李由義), 좌조방장 김종례(金宗禮), 우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전주 부윤 권수(權燧), 광주 목사 권율(權慄), 나주 목사 이경록(李慶祿),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고부 군수 이광인(李光仁), 장성 현감 백수종(白守宗), 고산 현감 신경희(申景禧), 함열 현감 정연(鄭淵), 동복 현감 황진(黃進), 구례 현감 조사겸(趙思謙), 익산 군수 고성후(高成厚), 장흥 부사 장의현(張義賢) 등 전라도 각지의 군관을 이끌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한다. 온양에서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충청도 병마절도사 신익(申翌),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 충청도 조방장 이세호(李世灝), 충청도 수군절도사 변양준(邊良俊)이 이끄는 충청도 군사들이 합류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도 경상도 방어사 조경(趙儆), 좌조방장 양사준(梁士俊),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등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이광은 김수를 패군한 장수라 비난하며 합류를 거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렇게 모인 삼도근왕군은 그 수가 5~8만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들 조선군이 수만 많았지, 사기는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순창과 옥과의 병사들이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이라는 인간들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창 군수 김예국(金禮國)은 홀로 도망쳐 이광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여기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이 이끄는 부대가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공격받아 와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 8천여명도 전주에서 와해되었고 이광의 군관 옥경조(玉景祚)가 도망가는 병사들을 죽이며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광주, 나주, 전주의 군사들이 용인에서 다들 도망가는 바람에 광주 목사 권율, 나주 목사 이경록, 전주 부윤 권수가 이들에게 소리치며 말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광은 최원에게 전라도에 남아 반란을 진압케 한다. 최원이 남원 판관 노종령과 함께 순창에 도착했을 때에는 순창 군수 김예국이 조인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한 후였다.

이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진격했으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이때의 조선군은 제대로 된 준비없이 급조된 부대에다가 지휘관들조차 대부분이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 특히 작전 회의에서부터 문제였는데 권율이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다른 장수들은 수원의 독성 산성에서 진을 쳐야한다고 반박이 나오는 등 의견도 합의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자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광이 이를 듣지 않고 전투를 그대로 강행한 것이다.[4]

전투 초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본대 1000명은 한양에 있었고, 부장인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잔여병력 600명을 북두문산과 문소산에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6월 4일 이광은 조방장 이지시와 전 첨사 백광언(白光彦)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북두문산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케 한다. 백광언은 일본군 십여명을 죽이고 북두문산의 일본군 진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운다. 와타나베는 문소산으로 철수하고 와키자카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6월 5일 전날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군은 다시 백광언을 내세워 문소산의 일본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문소산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결국 시간만 흐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와키자카가 이끄는 본대가 지칠대로 지친 조선군을 공격했고 백광언과 이지시, 이지례 형제, 의병 양팽[5]이 전사한다. 백광언[6]과 이지시는 모두 용맹하다고 알려졌는데, 이들이 모두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ㅡ 조경남 난중잡록 임진년 상

결국 다음날인 6월 6일 아침, 밥을 지어 먹던 조선군은 와키자카 군의 기습을 받고 패하여 일단 후퇴하게 된다. 와키자카 가문의 군기인 <와키자카기(脇坂記)>에 의하면 이때 거둔 수급이 1천여급, 생포 2백여 급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조선군을 밀아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 일본 쪽에서도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붕괴'시켰다거나 '섬멸'했다고 하지 않고, '궤주(潰走)'시켰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ㅡ 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

다른 기록에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밤이 되어 광언 등을 시켜 적의 진을 기습하여 울타리를 넘어 바로 들어가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찍어 머리 10여 개를 베었으나 마침 짙은 안개가 꽉 차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진중에 있던 적이 모두 언덕에 올라 안개를 이용해서 총을 쏘고 뒤에서 엄습하니 광언 등이 모두 죽고 날이 새고 안개가 걷히자 적의 군사 4, 5천이 우리 진과 서로 2, 3리 거리에서 대치하여 적의 총소리가 한 번 나자 우리 대군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광 등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해 달아나고 8만 군사가 잠깐 동안에 모두 흩어졌다. 패전한 소식이 행재소에 들어오니 상하가 서로 쳐다보며 한숨과 탄식만 내뿜을 뿐이었다
ㅡ 기재잡기

최초 백광언, 이지시의 2천 선봉을 세운 전초전에서 안개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앞에선 조총, 뒤에선 일본군의 엄습에 예상 밖의 패배를 겪고 장수들이 죽어나가 사기가 떨어진 틈에 다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조총에 겁먹은 장수들이 먼저 도망치자 훈련이 제대로 안 된 병사들 사이에 전장 공포 심리가 확대되어 개미 떼처럼 패주하고 만 것이다.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지휘관들이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을 지나치게 재촉하다 일어난 참사였다. 《정만록》에 의하면 당시 삼도 연합군은 다수의 기병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3. 결과

용인 전투의 결과로 직접적인 병력 손실은 크지 않았다할지라도 기껏 모인 장수들과 병사들이 흩어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져 도성을 수복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양이 탈환된 것은 1년 뒤인 1593년 5월의 일로, 일본군은 그동안의 피해와 권율이 이끈 행주대첩, 죽산성을 점령한 황진의 추격 등으로 인해 한계에 이르러 1593년 4월 한양에서 물러났고, 이를 무혈 입성하는 것으로 탈환하게 된다.

대국적으로 보아도 이 전투의 결과는 무시하기 힘들다. 수도 탈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만약 근왕군이 한양을 탈환했으면 당시 평양을 공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보급로를 끊을 수도 있었고, 함경도로 진격하던 가토 기요마사를 배후에서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인 전투 한 달 뒤에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어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결과만 두고 본 일이고, 만약 근왕군이 용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 시점이 임진왜란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용인 전투에 한해서는 어떻게 봐도 와키자카의 대전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갔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삼남 지방 전체가 일본군에게 넘어갈 위기였다.

단기적으로 봐도,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 삼남 지방에서 관군의 영향력이 대폭 감소한 계기가 된다. 왜냐면 용인 전투 패전 이후에 지방에 있던 병력과 용인 전투 이후 흩어진 병력들이 관군이 아니라 지방 유력자들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임란사에 입문할 때 가장 큰 혼란을 경험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원래 군 지휘관인 게 당연한 목민관이 의병장이라거나 의병인데 신분이 관군인 등등 관군과 의병이 서로 칼로 두부 자르듯 딱딱 나눠지지 않고 이리저리 뒤섞인 형태라는 것이다. 당장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조헌이 동원한 의병이 이치 전투에 동원된 관군 총 병력보다 많은 판이라... 다만 조선에서 60세 이하의 성인 남성은 법적으로 모두 예비군 비슷한 위치였기에, 장교가 전시상황에서 예비군을 소집해 끌고다닌거라고 생각하면 좀 이해가 쉬울것이다. 다만 제승방략 체제에서 이 소집병력을 이끌어야 할 경군 장수가 없으니 정식 지휘체계 없이 정규군 지휘관이 개인적으로 편성한 의용군 같은 어정쩡한 위치가 된 것이다. 어차피 실제로도 전쟁 후반이 되면 의병조직은 점차 관군으로 재편성 된다.

4. 논란

4.1. 삼도 근왕군의 병력 규모

먼저 8만설의 출처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하니, 주(호성감(湖城監) 이주(李柱)를 말함)가 아뢰기를,
"신이 처음 충주(忠州)에서 사변을 듣고 왔더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거둥하였습니다. 그래서 검찰사(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막하에 소속하였었는데, 양원은 남병(南兵)이 이르지 않음을 걱정하였습니다. 신이 의병(義兵)을 소모하러 호남(湖南)에 가는 길에 용인(龍仁)에 이르니 3도(道)의 병마가 거의 8만이었습니다."
ㅡ 선조 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 계축 1번째 기사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湖西)의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로 호칭[7]하여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대하였다.
ㅡ 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4번째 기사

여기에 아래 나오는 선조 실록 140권에도 8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에 따르자면 전라도에서만 최소 6만 병력을 동원했는데, 용인 전투에서 패한 직후 전라 병사 최원이 다시 1만 ~ 2만을 끌고 올라온 것까지 합치면 전라도에서만 8만 가까이 병력을 뽑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과연 당시 전라도에서만 이렇게 많은 병력을 끌어오는 게 가능했을지 의문시하는 시각이 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거고 병농일치제를 채택한 조선의 군적에 오른 병력이 최소 20만이 넘어갔는 데다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보았을 때 8만명 설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서애집 9권을 보면 전란 이전 전라도의 군정 수가 83685명이라 되어 있다. 이 군정들을 거의 다 동원했다고 가정한다면 전라도에서 8만에 가까운 수를 뽑는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면에,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근왕병이 5만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와키자카기에서도 5만 정도로 기재하고 있다. 대충 전라도 4만, 충청도 8~9천, 경상도 100명 정도이다.

그 밖에 기재사초[8]에는 10만, 장양공전서[9] 등엔 10만이 넘는다고 나와있기도 하나 아무래도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 위의 사료들에 비하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지라, 일반적으로 근왕병 8만설과 5만설이 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피난민까지 합치면 13만이라는 말도 기재되어 있다.

반면 직접적으로 싸운 적군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일본 기록인 와키사카기에선 6월 5일에 '성안의 부대는 소인원', '야스하루가 산기슭에서 깃발을 치켜들고 야마오카 우콘을 앞세워 단기필마의 기세로 몰아 붙였다.'라고 하며, 징비록에선 다음날인 6일에 ' 이튿날 적병 수 명이 칼을 휘둘러 전진하자 삼도의 부대는 이를 바라보고 크게 무너졌다.'고 하는 것을 보아 첫날엔 소수 인원에 근왕군 선봉대가 패하고, 둘째날엔 몇 명에게 근왕군 5만 전체가 빤스런 한 것으로 판단된다.

4.2. 전사자 수만 명 설

용인 전투의 결과 3만이 남았다고 하는 설. 8만명설에 따르면 5만이 죽은 셈이고, 5만명 설에 따르면 2만이 죽은 것이 된다. 출처는 역시 조선 왕조 실록.
검토관 최상중(崔尙重)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군사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양식이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장수가 없는 나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신이 보건대, 임진란 때 용인(龍仁)에서 이광(李洸)이 싸울 때 우리측 군사가 거의 8만 명이나 되었으니, 그후 굶어죽거나 적의 칼날에 죽은 자가 비록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은 자가 3분의 1은 넘을 것으로 3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남 지방 사족(士族)의 집은 노자(奴子)가 10여 명이 넘는데, 이처럼 국사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노자를 다 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집에서 2명 ∼ 3명씩만 내어도 5만 ∼ 6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사의 숫자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ㅡ 선조 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8일 계사 2번째 기사

그런데 검토관은 정6품 관직의 문관으로 주로 임금에게 경서를 낭독하고 논평하는 일을 주로하는 직책이다. 즉,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3만이 남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못해도 3만은 남았을 것이라고 최상중의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와키자카가 이끌던 병력은 본래 수군[10]이었으므로 장수를 제외하면 말이 거의 없었다. 천명 좀 넘는 일반 보병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다해도 기병까지 합류한 수만을 섬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대로 와키자카기에서도 수급 천여개와 포로 200이라고 적혀있으니 수만을 몰살시켰다는 건 말이 안된다.

마지막으로 위 선조 수정 실록 26권에도 나와있듯 일본군은 근왕병을 추적하지도 않았는데, 경기도가 무슨 나폴레옹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동토 러시아 땅도 아니고(용인 전투는 한여름인 7월의 일이다), 전라도까지만 도망치면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데 수만이 굶어죽었다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 여담

  • 중위장으로 참전했던 권율은 교전없이 휘하 병력을 온존한 채로 퇴각했고, 실록에 따르면 오직 권율만이 패전 이후 곧바로 전라도를 방어할 계측을 내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이치전투와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일궈낸다.
  • 훗날 이치 전투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하는 황진도 부대를 온전히 보전한 채 퇴각하였고, 맹주로 군사를 이끌던 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용인 전투 패배뒤 병력 손실 없이 전라도로 돌아온 것은 권율과 황진 정도 뿐이고, 그나마도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이 다시 2만 병력을 데리고 강화도로 가는 바람에 용인 전투 후 한달도 채 안되는 시간내에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은 수만의 근왕병이 온데간데 없이 1500명 수준으로 급감한다. 당시로는 굉장히 위기 상황이었던 것인데[11] 다행히 숫적으로 몇배인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이치 전투 패배 이후 일본군은 정유재란 전까지 전라도 진입 시도를 하지 않았는데, 용인 전투에서 병사들 자체가 많이 죽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뿔뿔이 흩어진 병력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패배의 충격에서 회복하고 재편성을 마치고 전라도 방어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전라도 방어 병력이 천 명 수준이면 일본군이 다시 진입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2]
  •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에 대해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13]고 힐평하였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였던 실전 경험 부족과 하급 지휘관의 부재[14]라는 조선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15] 그러나 1600명의 병력으로는 조선군을 밀어내기 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 대부분의 병력은 살아남았고, 이 병사들이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왜적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해낸다.
  • 당시 일본군은 근왕군 5~8만 명을 싸먹기 위해 3개 군세가 기동중이었는데, 쌩뚱맞게 1600명이 그걸 다 흩어버려서 다 놓쳐버렸다. 당사자야 역사에 남을 대승이지만, 다른 장수들로선 흩어져서 유격전을 벌이는 수만명을 보며 뒷목을 잡을 수밖에.
  • 이 전투이후 진위현(오늘날의 경기도 평택) 남쪽에 진을 치고 적을 기다리던 의병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균의 동생 원연. 용인에 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진에 처들어가 대승을 거둔다. 의병들을데리고 그중 기병들만 추려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들을 유인한 다음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시간을 끌었고 그동안 나머지 병력을 몰래 매복시켰다. 그렇게 매복이 끝나자 기병이 왜군들을 지세가 험난한 햇골로 끌어들인 다음 입구를 막아버리고 화살과 죽창을 퍼부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전투는 햇골전투라고 불렸다.
  • 이이화 교수는 한국사 이야기 7권에서 조선군이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한 여력이 있었을 리 없다고 많아야 3만명 쯤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그냥 "과장됐으리라"라는 식으로 말한 것뿐이고 별다른 근거는 부족하다. 실제로 조선은 병농 일치제였기에 작정하고 뽑아내면 5만명 이상의 병력을 뽑아내는 건 생각외로 쉬웠고 실제 장부상에 30만이 넘는 병력이 군적에 올라 있었다.[16] 게다가 패배했던 조선 측에선 체면 문제로 군세를 축소해야할 판인데 오히려 선조 실록에는 7만 ~ 8만의 조선군이 패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7]
  • 당대와 연결되지 않지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원연이 그 공으로 맡게 된 연기군(오늘날의 세종시)에서 훗날 신사실화에 속하는 화가 장욱진이 태어나는데, 말년에 용인 구성에 머물다가 죽는다. 그런데, 그 기념관은 경기 북부 양주 장흥면에 위치했다. 게다가 근방에는 용인전투를 이끈 권율 일가의 묘가 존재한다. 더불어 장욱진의 이미지를 롤모델로 한 김회장역을 연기한 최불암이 등장하는 전원일기에서 둘째 사위 역으로 등장한 임채무가 운영하는 두리랜드도 위치한다. 이래저래 연결이 많이 된다.

6. 대중매체

6.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된 용인 전투. 조선군의 숫자는 5만으로 설정되었다. 광주 목사 권율이 육군력이 강한 왜군에게 단병접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며 5만 군사를 5천으로 10개 부대를 나눠 운용하자고 이광을 설득하지만 이광은 그런 거 없다며 우라돌격을 시키고, 그 결과 왜군의 유인책에 밀려 허망하게 대패하고 만다.
임진년 6월 5일부터 6일 양일 간, 도성 수복을 위해 결진했던 조선 하삼도 연합군과,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용인 전투는 조선군의 철저한 패전으로 허망하게 끝이 났다.
광주 목사 권율. 그도 이 날의 패전지장이었다. 그러나 권율은 이후, 이치 전투에서 행주 대첩까지 승첩을 이어가 도성 탈환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니, 그가 이 날의 전투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용인 전투, 그 패전이 군왕 선조와 조정에 던진 파장 또한 컸다.
이미 경기, 황해, 평안 삼도 군사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데 이어, 마지막으로 믿었던 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도성 탈환마저 무위로 끝나버렸으니, 육지로 진격하여 이미 평양성 앞까지 와 있는 일본군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을 대부분 잃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6.2. 징비록


6.3. 한산: 용의 출현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 대첩 이전 승리한 전투로서 작중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를 치르던 시절의 꿈 얘기를 광양현감 어영담에게 털어놓는데, 어영담은 용인 전투를 와키자카가 한양 도성에서 싸우지 않고도 한양 도성을 지켜낸 전투라 평하며 이순신이 해상전에서 학익진을 펼치는 작전을 세우게 하는 기틀을 만든다.


[1] 징비록, 와키자카서, 선조 140권, 34년(1601년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 기사[2] 공교롭게도 이로부터 40여년 뒤에 여기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했다.[3] 군 편제로 비유하자면, 2개 군단급 병력이 고작 1개 연대에게 와해가 된 것이다.[4] 이광이 이럴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출정할 때 조정으로부터 적극적 공세를 벌일 것을 압박 받고 있었다. 이광은 이미 한번 후퇴했던 것을 조정이 이걸 죽여 말아 하다가 사람을 보내 불러 낸 상황이라 한번 더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광이 이후 전라도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고려하면, 이광이 무능하다기 보단 무모한 전투를 강요한 선조와 조정의 책임이 크다.[5] 고경명 휘하로 이치 전투에 참가한 양대박의 아들이다.[6] 무거운 철퇴와 칼을 잘 썼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비록 총 맞고 죽긴 했지만 무려 일본군 23명(일본 기록에서는 22명)을 참살하고 죽기 직전 칼과 철퇴를 던져 한 명을 더 죽이기도 했다.[7] 호왈 10만(원문:兵號十萬)이라는 소린데, 정말 10만이면 그냥 10만이라 쓰지 호칭 같은 말은 붙이지 않는다. 그러니 병력이 10만에 못미친다는 말이다.[8]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의 일기[9] 이일 장군의 제승방략 시행 건의한 장계 등을 수록하여 3권으로 전해지는 책, 1893년작[10] 수군이라도 일본의 수군은 어디까지나 접선해 백병전을 주 임무로 했으므로 장비나 숙련도가 육군과 다를바가 없다.[11] 나중에 권율 스스로도 임진왜란에서 최대 위기 상황이었다고 말 했을 정도.[12] 정유재란 때는 전력으로 전라도를 공격한 것만 봐도 일본군이 전라도 곡창지대의 중요성을 몰랐을리는 없다. 애초에 일본의 한반도 침공사를 통틀어봐도 12세기 이후의 침공로는 줄곧 전라도를 위시한 서해안이었고 오히려 부산을 통해 육로로 진군한 것이 특이한 사례였다.[13] 중국의 송사 열전에서 남송이 원나라에게 패할 때 사용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14] 개국 초 각 제대를 통솔해야 할 부사관급 지휘관들을 갑사라는 특수병종을 신설해 몰아넣어 버리면서 생긴 이 문제는 그 당시로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반란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군권을 무관들한테서 철저하게 통제했다. 이 문제는 왜란 이후 오군영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개선된다.[15] 평화에 익숙해진 농민군에 그들을 이끄는 총지휘관의 자질도 떨어지니 무너지기 쉬웠다. 물론 일본도 농민 개병제긴 했지만 이쪽은 전쟁으로 죽어나가는 게 일상사였던 전국 시대에 익숙해진 상태라 말이 농민 개병제지 영지병으로 전장에 끌려가는 일이 워낙 많아 기풍이나 실전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사무라이가 여러 이유로 몰락해 농민으로 굴러떨어진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살기 팍팍한 농민들이 패잔병들을 사냥하는 부업을 할 정도였으니, 조선에서 상민들도 적지 않게 문해력을 갖췄던 것처럼 여기는 농민=전투력 없음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웠다. 물론 여진족과의 충돌이 잦았던 북방의 함경도, 평안도 쪽 육군이나 을묘왜변의 교훈을 얻어 판옥선을 건조하고 이순신 부임 이후 또한 판옥선과는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력을 증강하고 있던 수군은 사정이 달랐다.[16] 다만 이 병력은 농사를 지으러 가야되기 때문에 동원숫자가 매우 들쭉날쭉했기에 긴급시 총동원 가능인원이라 봐야한다.[17] 사실 이이화 교수는 재야사학자라 나무위키에서도 지적된 잘못된 정보들을 사실마냥 서술한 엉성한 실수들을 꽤 보였는데 가령 명나라에게 형식상 화령과 조선 중 국호를 정해달라한걸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던것이 그 예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