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제국대학 재학시 | |
성명 | 장철수(張徹壽 또는 張澈壽)[1] |
아호 | 죽암(竹巖) |
본관 | 인동 장씨 |
출생 | 1908년 7월 2일 |
사망 | 1954년 6월 5일 (향년 45세) |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1가 명동성모병원 | |
학력 |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교토 제3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
경력 | 주 아르헨티나 일본공사관 3등 서기관 일본 외무성 사무관 대한민국 외무부 정무국장 경북대학교 교수 |
고등문관시험 합격 당시[2]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 및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외교관. 특히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해 일본 외교관이 된 유일한 조선인이다.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해외-일본 부문에 등재되었다.2. 생애
1908년 7월 2일 태어났다.[3] 기생이었던 어머니에게서 서자로 태어났다고 한다.[4]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교토의 제3고등학교[5]를 거쳐 1933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영법(英法) 전공으로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했다.[6]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조선인은 모두 408명에 달하나 대부분 행정과와 사법과였고 가장 어렵다는 외교과 합격자는 장철수가 유일하다.[7][8]1934년 주프랑스 일본대사관 서기생, 1935년 주벨기에 일본대사관 외교관보, 1938년 주아르헨티나 일본공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939년 일본 외무성 본부 사무관으로 승진해 통상국과 조사국 등에서 1943년까지 근무했다. 1944년부터는 무보직 상태로 광복을 맞을 때까지 경성에 체류하는 날이 더 많았으며, 이 당시 김성수와 송진우의 집을 드나들면서 일본의 패망을 단언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외무부 초대 정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정무국장으로 재직하던 1949년 5월 외무부 모 과장의 생일잔치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택상 전 외무부장관을 비판한 일로 시경 사찰과장이었던 최운하의 조사를 받게 되자 그날로 사직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면서 폭음과 독설로 자학에 빠진 광적인 생활을 했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외교사를 강의하며 교수로 재직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1954년 6월 5일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1가 명동성모병원에서 간암으로 별세했다.
3. 외모
많은 이들이 그를 특이한 외모를 가진 인물로 기억한다. 이인기는 "땅딸막한한 키에 얼굴 면적이 넓고 좌우로 퍼졌으며 눈이 유난히 가늘어서 웃는 상이며 얼굴빛이 붉었다"고 회고했고, 도쿄제국대학 후배로 동아일보 총무부국장을 지낸 윤현배는 "작달막한 키에 벌어진 어깨, 몽골리안의 후예답게 광대뼈가 나온 널찍한 네모꼴의 얼굴"이라고 묘사했다.4. 기타
이인기 전 영남대학교 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 합격 후 일본 정계 인사를 찾아가 자기의 장래를 물었는데, "잘해봤자 간도총영사"일거란 식의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1979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조선인 도공의 후손으로 외무대신까지 오른 도고 시게노리가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장철수를 개인적으로 불러 격려하고 술도 같이 마셨다고 한다.
상기했듯 친일인명사전에도 등록된 인물이지만, 정작 본인은 독립운동가였던 고하 송진우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독일 패전을 전후한 시기에 송진우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소련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을 방문한 웰키의 소련 실태 조사보고서라고 할 《하나의 세계》를 증정하면서 송진우에게 세계 정세와 전쟁의 전망, 그리고 카이로 선언, 얄타 회담, 대서양 헌장 등 구미 각국의 동향을 자세히 전하기도 했다.
이복형으로 장성수(張城壽)가 있다. 아호가 감산(堪山)이라 장감산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대구 출생이며 한학과 주역에 통달했고 풍수지리와 역학의 대가로 경북의 어느 산사에 은둔한 거사였다고 한다. 사족으로 박정희가 그를 사부로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장감산이 박정희에게 5.16의 거사 날짜를 잡아주고 성공을 계시했다거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을 푸는데 은밀히 간여했다는 등의 야사가 있다.#
'살아 있는 옥편'[9]이란 별명이 따라다녔고, 생전의 지인들은 그를 '기억력의 천재'라고 회고했다. 언변에도 능해 좌담의 명수로 통했는데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의 숨은 비화에 훤해 화제가 무궁무진했다고 한다.
술고래로 술에 취하면 "이 장철수가... 이 대(大) 장철수가 말이여..."라며 큰소리로 뽐내는 주벽이 있었다고 하며, 결국 간암으로 사망했다.
[1] 사료마다 徹 또는 澈로 기록이 다르다.[2] 조선중앙일보 1933년 10월 2일[3] 출생지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군, 경상북도 경주군(#), 전라남도 무안부, '경성 통의동 148번지(#)' 등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서 성장해서 스스로 전라도 사람으로 자처했으며 경상도 인동양반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4] 부친에 대해서는 순헌황귀비의 승지였다는 얘기가 있다.[5] 당시 구제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제3고등학교는 현 교토대학 교양부로 개편되었다.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도 제3고를 졸업하고 교토제대에 입학했다.[6] 일설에는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말도 있으나 당시 합격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고만 되어 있다.[7] 행정과 135명, 사법과 272명, 외교과 1명.[8] 김성용은 외교과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다음해 구두시험을 칠 때는 외교과가 행정과에 통합되는 바람에 행정과에 최종 합격하여 행정과 합격자로 분류된다.[9] 한자를 많이 알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박람강기(博覽強記)하다는 의미로, 요즘 말로 하면 '살아 있는 백과사전' 정도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