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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클럽

일본의 제3지대·보수정당
자유민주당 신자유클럽 자유민주당
파일:신자유클럽 로고 1983.png
新自由クラブ
<colcolor=#C80000><colbgcolor=#f5f5f5> 영문 명칭 New Liberal Club
한글 명칭 신자유클럽
창당일 1976년 6월 25일 (자유민주당에서 분당)
해산일 1986년 8월 15일 (자유민주당과 합당)
이념 보수주의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온건 보수주의
당 색
주황색 (#F44336)
(창당 초기)
붉은색 (#C80000)
(해산 직전)
대표 고노 요헤이 / 8선 (, 31~38대)
참의원
1석[1] / 252석 (1.32%)
중의원
6석[2] / 512석 (1.84%)
전신·후계 정당

1986년 8월 14일 기준
1. 개요2. 자민당 분당과 창당까지3. 당 내 위기와 제3지대 모색4. 다시 자민당으로5. 역대 대표6. 역대 선거결과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
7.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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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origin_1.png
1976년 자유민주당 소장파인 고노 요헤이 등이 설립한 초파벌 그룹 정치공학연구소 소속 국회의원을 필두로 창당된 중도우파 성향 정당이다. 창당 10년 뒤인 1986년 자민당에 흡수합당되며 해산됐다.

2. 자민당 분당과 창당까지

1974년,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게 수사의 손길이 미치는 등 일본 사회에 정치윤리가 큰 과제에 올랐을 무렵, 당내 개혁을 촉구하며 자민당을 탈당했던 중의원 의원 고노 요헤이, 타가와 세이이치등을 필두로 1976년 6월 15일, "깨끗한 보수", "정직한 보수" 를 케치프레이츠로 내걸고 창당되었다. 또한 창당의 핵심이된 자민당 소장파 그룹 정치 공학 연구소는 당 내부의 젊은 층을 모아 주재한 계파로, 탈당한 6명의 의원들 외에 후지나미 타카오, 하시모토 류타로등도 참가하고 있었다.그러나 후지나미와 하시모토는 고노의 권유를 거절하고 자민당에 잔류하게 된다.

오랫동안 보수성향 정당이 자민당 일당에 불과했던 가운데 새로운 보수정당의 창당은 진보정당 지지를 주저하면서도 자민당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지층을 끌어당겼다.[3]. 창당 직후인 12월에 치러진 제3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모두 17명을 당선 (추가 입당 1명) 시키는 등 당세를 확대시키며 승승장구 하였다.

3. 당 내 위기와 제3지대 모색

그러나 신자유 클럽의 중도정당화를 목표로 삼아 나가야 한다는 고노 요헤이, 타가와 세이이치 등과 비자민계열의 제2의 중도 보수정당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니시오카 다케오[4], 야마구치 토시오 등의 당 내 안정파와 개혁파 사이의 정치의견 차이로 대표 고노와 간사장 니시오카의 대립이 심해졌다.급기야 서로간의 네거티브전까지 펼치면서 당내 계파간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당내 대다수는 고노의 의견을 따르는 초선의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결국 니시오카를 포함한 당 개혁파들은 신자유 클럽을 탈당해 자민당으로 복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 내부의 갈등으로 당 운영의 혼란이 두드러져 정책적으로도 자민당과의 뚜렷한 차별성을 내지 못했고, 1979년 제35회 총선거에서는 4석이라는 부진한 결과로 참패하게 되었다. 총선거 이후에 치러진 총리 지명 선거에서는, 자민당 내부에서 40일 항쟁[5] 이 일어난 가운데 신자유클럽은 자민당 총재인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해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모색했지만, 이는 신자유클럽의 지지자와 야당, 미디어의 거센 비판으로 이어졌고, 고노는 이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사임, 이후 타가와 세이이치가 대표로 취임했다.

이러한 자민당 2중대라는 오명을 벗기위해 한때 같은 소수 정당인 사회민주연합[6]과의 반자민 공투를 염두에 두고 신자유 클럽·민주 연합을 결성했지만, 그 이후 당내 노선 차이로 회파가 무산되었고, 이후에도 민사당, 사민련과의 신 중도정당 신설 구상을 내놓았지만 빈번히 무산되고 또 다시 자민당과 연대하는 등 이도저도 아닌 노선혼란을 겪으며 정계 내부에서 뚜렷한 입지를 확립하지 못했다.

4. 다시 자민당으로

1983년 제37회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 의석수에 미달되자 신자유클럽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다.자민당은 추가공천을 하면 과반을 확보했지만 여당에서 과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신자유클럽의 8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3년 12월 26일, 통일회파 자유민주당, 신자유국민연합 을 결성하고 나카소네 2차 내각 출범식에서 타가와가 자치대신으로 입각하게되며 1955년부터 28년간 이어져 온 자민당 단독 정권이 일단 마무리됐다.

1984년 6월에 고노가 대표직에 복귀. 내각에서 야마구치 도시오가 노동대신, 고노 요헤이가 과학기술청 장관으로서 각각 입각하게 된다.

그러나 1986년 제38회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압승을 거둔 반면, 신자유클럽의 결과는 전체 6석의 초라한 결과로 크게 부진했다.

결국 약해진 당세로 더이상 당을 운영 할수 없다는 당 대표 고노 요헤이의 판단 아래, 8월 16일 당을 해산하고 대다수의 의원들이 자민당에 복귀했다.[7]

5. 역대 대표

파일:신자유클럽 로고 1983.png 신자유클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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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고노 요헤이
2대
타가와 세이이치
3대
고노 요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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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대 선거결과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83년(37회) 17 8 [▼2] 1,341,584 2.36%
1986년(38회) 12 6 [▼2] 3,895,858 6.44%
정당해산(자유민주당 합류)

7. 관련 인물


[1] 비례구 1석[2] 지역구 6석[3] 주로 20-30대 대학생들과 중도보수 성향의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40년뒤 대한민국에서 창당되는 바른정당의 포지션과 유사한 모습을 볼수있다.[4]국민민주당 소속 나가사키 1구 지역구 의원인 니시오카 히데코 의원의 아버지이다. 2010년 작고.[5] 1979년 자민당 내에서 일어난 파벌 항쟁으로, 당 내 비주류파가 당시 총리였던 후쿠다 다케오를 총리로 추대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주류파인 오히라파 의원들이 이를 저지했고, 이에 비주류파(후쿠다파) 의원들이 총리 지명을 위한 의원 총회가 열리는 당 홀을 봉쇄하고 거세게 항의하는등 자민당 최대의 위기로 불렸던 사건이었다.[6] 에다 사츠키, 간 나오토 등이 소속되었던 군소 진보정당.[7] 이 과정에서 신자유클럽의 2대 대표를 맡은 타가와 세이이치는 자민당과의 합당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진보당이라는 군소정당을 창당했고, 신자유클럽의 유일한 참의원인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자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수행했다.[8] 신자유클럽에 소속된 적은 없었지만, 무소속으로 재직중이던 초선의원 시절 뜻을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