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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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당 당수 ▶ |
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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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77대 일본국 후생대신 | |
민사당 제7대 중앙집행위원장 오우치 게이고 大内啓伍 | Ōuchi Keigo | |
<colbgcolor=#FE0000><colcolor=white> 출생 | 1930년 1월 23일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쿄바시구 (현 도쿄도 주오구) | |
사망 | 2016년 3월 9일 (향년 86세) |
일본 도쿄도 오타구 | |
학력 |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문학 / 학사) |
의원 선수 | 6 (중) |
의원 대수 | 34, 35, 36, 37, 39, 40(중) |
지역구 | (구) 도쿄도 제2구 |
소속 정당 | |
약력 | 민사당 직원 민사당 정책심의회 위원장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 민사당 제7대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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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30년 1월 29일 도쿄부 도쿄시 쿄바시구(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긴자에서 료칸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952년 와세다대학 법학부 졸업 이후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 당초 오우치는 사법시험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오우치의 료칸을 방문한 카스가 잇코 의원의 조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우파사회당에 입당해 정책심의회 사무국에 취직해 활동했고, 1960년 민주사회당 창당 당시 당 정책심의회 사무국장과 비의원 신분으로 정책심의위원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사당 소속으로 구 도쿄도 제2구에 입후보한 뒤 첫 당선되어 중의원 뱃지를 달게 되었다. 당선 이후 사사키 료사쿠 위원장 체제에서 민사당 정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85년 츠카모토 사부로 서기장이 위원장으로 올라가자 당 서기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일본연사공업 조합이 민사당 소속 중의원인 요코테 후미오(横手文雄, 1935-2021)에게 뇌물을 준 정황이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뇌물수수 사실을 부인하는 요코테의 기자회견에 동석한 영향으로 인해 동반낙선 하는 아픔을 겪고만다. 오우치는 낙선 이후에도 당 서기장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89년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인 츠카모토 사부로가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자 같이 사임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하지만 민사당은 사회당과의 표 분열로 20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고, 이 여파로 나가스에 에이이치 위원장이 사임하자 후임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고 타 야당들이 연합해 뭉친 호소카와 내각에서 후생대신직에 오르면서 첫 입각에 성공했다.
1994년 2월, 호소카와 내각이 소비세 제도를 폐지하고 세율 7%의 복지목적세를 창설하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발표했지만, 문제는 후생대신인 오우치가 이 사실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우치는 호소카와 내각의 대장대신인 다케무라 마사요시, 일본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보조를 맞춰 국민복지세 정책에 반대했고 호소카와도 이를 받아들여 국민복지세는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1]
94년 4월 호소카와 총리가 사퇴하자 그 직후 설립된 하타 내각에서도 후생대신직에 유임되었지만,[2] 오자와의 일방적인 모습에 불만을 품은 사회당이 연정에 이탈한 뒤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꾸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하타 내각은 64일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단명하고 만다. 하타 내각의 해산 직후 오우치는 민사당 위원장에서 물러났고, 당은 신진당 신설합당에 참여하기 위해 34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정식 해산되었다.
1994년 12월 9일, 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하는 신진당에 합류하기 위해 민사당이 해산되자 츠카모토 사부로 전 중앙집행위원장과 함께 합류를 거부했다. 이는 창가학회가 모체인 공명당이 신진당에 합류하는 것이 이유라고 밝혔는데, 오우치와 츠카모토가 선거때마다 니치렌종 계통의 다른 교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츠카모토는 바로 자민당에 합류했고, 오우치 역시 자유연합이라는 군소 정당을 거쳐 1994년 6월 무라야마 내각 수립 후 자민당이 연립이지만 여당으로 복귀하자 결국 자민당에 합류했다. 자민당은 민사당 지도부 출신의 오우치를 바로 도쿄도련 최고고문에 올렸다.
그렇게 1996년 열린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4구 공인을 받아 출마했지만, 자민당·신진당 탈당파 출신의 무소속 아라이 쇼케이[3]에게 패해 낙선을 맛본다. 아라이가 당선 이후 자민당에 복당하면서 선거 출마 길이 막히는듯 했지만 그 아라이가 증권 스캔들에 연루되어 1998년 2월 자살하자 그 보궐선거에 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것인지, 가토 고이치 간사장이 오우치 고문을 설득해 출마를 막았다. 대신 가토로부터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 상위순번을 받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2000년 열린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모리 요시로 총리의 '신의 나라' 망언 역풍으로 자민당이 비례대표 도쿄 블럭에서 4자리밖에 얻어내지 못하면서 5순위로 입후보한 오우치는 또한번 좌절을 맛본다.
결국 2번 내리 낙선한 영향으로 정계를 은퇴하게 됐다. 한때 민사당 당수까지 역임했던 입장에서는 결국 초라한 마무리가 되었다.
2016년 3월 9일, 오타구에 있는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해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후 국무대신 역임 경력을 인정받아 정삼위(正三位)에 추증되었다.
3. 소속정당
<rowcolor=white> 소속 | 기간 | 비고 |
| 1953 - 1955 | 입당 정계입문 |
| 1955 - 196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신당 창당을 위해 탈당 |
| 1960 - 1969 | 창당 |
| 1969 - 1994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4 | 정당해산 |
자유연합 | 1994 - 199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6 | 자민당 입당을 위한 탈당 |
| 1996 - 2016 | 입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舊 도쿄 2구 | | 77,645 (15.33%) | 당선 (3위) | 초선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7,358 (13.91%) | 당선 (4위) | 재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323 (17.22%) | 당선 (3위) | 3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4,407 (14.01%) | 당선 (3위) | 4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1,710 (12.72%) | 낙선 (6위)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0,882 (15.26%) | 당선 (4위) | 5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3,314 (15.09%) | 당선 (2위) | 6선[4]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도쿄 4구 | | 46,840 (22.68%) | 낙선 (2위)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비례대표 (도쿄) | 1,110,177 (19.49%) | 낙선 (5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