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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55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9.3 포격전) | 1958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진먼 포격전) | 1995 ~ 96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 |
관련문서: 양안관계 | 국공내전 | 국부천대 | 진먼 | 롄장 | 2022년 위기 |
진먼 포격전 金门炮战 (금문포전)[1] 八二三砲戰 (8.23포전)[2] Second Taiwan Strait Crisis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 ||
기간 | 1958년 8월 23일 ~ 12월 2일 | |
장소 | 중화민국(대만) 푸젠성 진먼현 및 마쭈 열도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중화민국| ]]|
지원국 | [[틀:깃발| | ]][[틀:깃발| ]][[미국|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후롄| ]] [[틀:깃발| ]][[틀:깃발| ]][[지싱원| ]] [[틀:깃발| ]][[틀:깃발| ]][[야오다오이| ]] [[틀:깃발| ]][[틀:깃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틀:깃발| ]][[장제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펑더화이| ]] [[틀:깃발| ]][[틀:깃발| ]][[쉬샹첸| ]] [[틀:깃발| ]][[틀:깃발| ]][[펑더칭| ]] [[틀:깃발| ]][[틀:깃발| ]][[류잔팅| ]] | ]][[틀:깃발| ]][[마오쩌둥| ]]
참전 부대 |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 중화민국 해군 남부 초계전단 중화민국 해군육전대 상륙장갑차대대 중화민국 공군 미합중국 해군 제7함대 | 중국 인민해방군 육군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동중국해 함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고속정 전대 12개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
병력 | 병사 92,000명 화포 308문 전투기 최소 70여 기 | 병사 215,000명 해안포 600여 문 전투기 800여 대[3] |
피해규모 | 440명 전사 화포 14여문 파괴 수송함 3여대 격침/파손 | 460명 전사 민간인 218명 사망 화포 80여문 파괴 어뢰정/고속정 18여대 격침/파손 전투기 24기 피격 |
결과 | 중화민국 국군의 방어전 성공 중국 인민해방군의 진먼 섬 점령 좌절 | |
영향 | 진먼 섬의 본격적인 요새화 시작, 양안간 산발적 포격전은 이어짐. |
[clearfix]
1. 개요
1958년 8월 23일부터 12월 2일까지 진먼섬(金門島: 금문도)에서 벌어진 중화민국 국군(대만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국지전. 하지만 실제로는 1979년의 미중 국교수립까지 쌍방 포격이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무려 21년간 대치했다. 아직까지는 양안간 최근의 실질적 군사충돌이다.2. 배경
지도에서 보듯 진먼섬(金門島: 금문도)은 중국 대륙에서 매우 가까운 섬으로, 샤먼시와 겨우 4km 정도만 떨어져 있어서 원래 해안포나 야포 사거리내로 들어와 있었고 현재는 전차포나 대전차미사일로도 공격이 가능한 거리다.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에 진먼섬은 중화민국의 최전선 역할을 맡았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 침공에 앞서 눈엣가시인 진먼섬을 점령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을 대만 해협에 집결시켰고 1950년 10월 25일 진먼섬 북쪽 구닝터우(古寧頭)에 상륙을 감행하였지만 진먼 같은 조그만 섬 따윈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는 인민해방군의 자만과 결사항전을 각오한 중화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인민해방군은 9000여 명에 달하는 상륙부대가 중화민국 국군에게 전멸하는 굴욕을 당했다. 때마침 이듬해 발생한 6.25 전쟁 때문에 베테랑 군인들이 한반도로 파병되었던터라 재차 상륙전을 준비할 여력은 없었다.1954년에는 중화민국 국군이 진먼섬 및 마쭈 열도에 군대를 증파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도 가만히 있지 않아 쌍방간 포격전이 발생함에 따라 제1차 대만 해협 위기가 발발하였다. 이때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암시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압력을 가했고[4] 결국 1년 뒤인 1955년에는 쌍방은 포격 중지를 합의하였고 미국은 중화민국(대만)과 방어조약을 체결하였다. 제1차 대만 해협 위기의 결과 중화민국군은 진먼섬과 마쭈 열도 방어에 성공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초 목표였던 푸젠성 완전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중화민국이 실효지배하던 저장성 앞바다의 다천군도를 점령하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중화민국 저장성 정부를 폐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차 위기와 6.25 전쟁 당시의 해공군 역량 부족을 교훈삼아 이번엔 소련으로부터 신형 전투기인 MiG-17의 라이선스 생산권을 얻어 생산해 J-5를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대규모로 배치하였고 동남부 연안 지역에 철도, 비행장, 해안 포대 등을 짓는 한편 인민해방군 해군의 함대 전력도 강화하는 등 중화민국과의 전쟁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3. 전개
1958년 7월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왕정이 붕괴함에 따라 미·영이 요르단에 병력을 급파하는 등 서구권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자 마오쩌둥은 이를 기회로 여겨 진먼 섬 근처로 대규모로 병력을 충원하고 인민해방군은 진먼 근처에서 수차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인민해방군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되자 1958년 8월 15일 진먼-마쭈 지구에 전투준비를 명령했고 증원군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에 인민해방군은 북경통신을 통해 "곧 진먼 섬을 해방할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를 기해 인민해방군은 진먼 섬 및 마쭈 열도에 대규모 포격을 개시하였다. 양측의 포격전은 매우 치열해서 오후 8시까지 약 40,000발의 포탄이 사용되었고 이날 하루에만 57,000여 발의 포탄이 소진되었다고 한다. 포격의 목표가 된 시설은 주로 군사 시설과 포대 진지 및 랴오뤄만(料羅灣, 요라만) 부두의 접안 시설이었는데 당시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관 후롄(胡璉, 1907-1977)[5]과 진먼을 시찰 중이던 국방부장 위다웨이(俞大維, 1897-1993)가 중상을 입고 진먼방위사령부 부사령관 자오자샹(趙家驤), 장제(章傑), 지싱원(吉星文)이 전사하는 등 혼란을 빚었으나 중화민국 육군도 대응 사격으로 포탄 12,000여 발을 발사하였다.
미국은 전투에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에식스급 항공모함이 포함된 제7함대와 당시 최신예 전투기 F-104A 스타파이터를 파견하여 중화민국 국군의 해상 보급로를 어느 정도 확보하거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를 해 주고 '블랙 매직'(Black Magic) 작전을 개시하여 중화민국 공군의 세이버에 AIM-9B를[6] 달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수송함에 M115 8인치 곡사포와 다수의 155mm 견인포 등을 실어 중화민국 육군에 공급하였고 인민해방군 공군의 폭격을 대비하기 위해 MIM-14 나이키 허큘리스를 공여하는 등 큰 지원을 해줬다.
한편 공중에서는 인민해방군 공군의 MiG-15와 MiG-17 (J-5) 총합 100여대와 중화민국 공군의 F-86F 세이버 32대가 서로 맞붙었는데 미그기들의 비행성능이 더 뛰어났고 숫적으로 우세했으므로 중화민국 공군의 F-86은 수세에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상술한 대로 미국이 중화민국 공군의 F-86에 단거리 공대공미사일 사이드와인더를 장착할 수 있게 개조를 도와줘서 세이버들이 전쟁 역사상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인 사이드와인더를 발사하여 첫 3발의 미사일이 다 명중해 MiG-17 3대를 순삭했고 패닉 상태에 빠진 중공 공군편대가 미사일을 회피하느라[7] 20여 대 이상이 격추되는 등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 공중전의 결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규모로 전투기를 동원했음에도 사이드와인더 쇼크로 인해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해 20대가 넘는 미그기가 격추당했으나 중화민국 공군은 겨우 2~3대 정도의 피해를 입어 중화민국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8] 한편 인민해방군의 MiG-17 한 대가 불발된 사이드와인더를 동체에 꽂고 생환했는데 이 사이드와인더는 소련에서 K-13으로 역설계당했다.
중화민국 해군은 진먼 섬에 보급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9월 1일 마궁(馬公) 항에서 출발하여 라오뤄 만으로 접근하다가 다음날 인민해방군 해군의 고속정 및 어뢰정들과 조우한 후 격돌하여 9.2 해전(九二海戰)이 발발하였다. 이 해전에서 무장 수송함 퉈장(沱江, 타강)호[9]가 심각하게 손상[10]당하고 LST 2척도 피해를 입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인민해방군의 함정 18여 척을 격침하거나 피해를 입혔다. 해군의 물자보급 작전에는 대만 해군육전대 상륙장갑차대대도 함께 참가하여 빗발치는 포격 속에서 영웅적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다.
지상에서는 중화민국 국군의 M18 헬캣과 프랑스에게 새롭게 구매한 M36 잭슨 등의 자주포들이 동원되었는데 특히 9월 3일에는 중국 본토의 군사 방송국을 포격으로 파괴할 정도로 대활약했다.
이후에도 1개월 넘게 쌍방간에 포격전이 이어져서 인민해방군 포병은 474,000발의 포격을 가하고 중화민국 육군 진먼방위사령부 포병부대는 82회에 걸쳐 128,000여발의 대응 사격을 실시하는 등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 사이에 미국과 소련은 사태가 확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국지전을 중단할 것을 압박하였고 결국 1958년 10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1주일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으며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 중지를 발표해 대대적인 공격은 없어졌고 포격전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10월 28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2일에 1번꼴로 포격한다'고 발표하면서 포격은 차츰 줄어 갔다.
그러나 1개월 중 하루 정도씩 벌어지는 간헐적인 포격 전투는 무려 1981년까지 이어졌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더 이상 대만에 대한 무력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후에야 진먼에서 포격전이 완전히 사라졌다.
4. 이야기거리
- 포격전을 치러본 중화민국 국군은 이와 같이 방비가 잘 된 섬은 아무리 본토와 떨어져 대륙의 적지에 고립된 곳이라고 하더라도 중국 인민해방군이 감히 무력도발을 감행하지 못한다는 요충지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후 강력한 방어능력을 갖춰 함부로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든 섬이 바로 대만(중화민국)이 실효지배 중인 타이핑다오다.[11]
- 계속된 포격으로 진먼 섬의 전체적인 높이가 2m 정도 낮아졌다.
- 한국일보의 최병우 기자는 금문 포격전에서 특파취재 중 1958년 9월 26일 조난당했고 결국 순직하였으며 진먼에 있는 태무산 충렬사에 안치되었는데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안치된 인물이다.
- 위에 언급한 것 같이 대규모의 충돌만 2~3번 이상 있었고 21년 동안 간헐적이지만 포격을 당했기 때문에 현재 진먼섬의 상당 부분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철갑판으로 된 벙커와 역시 중장갑인 포탑, 해안포 로서 쓰이는 M1 블랙드래곤 곡사포 포대 투성이다. 그래서인지 포격의 양에 비해서는 사망자나 부상자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21세기에는 양안관계가 그럭저럭 좋아져서 벙커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 중국 인민해방군이 쏘아댄 수십 만 발의 포탄 파편들은 식칼이 되어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여행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연복 셰프의 식칼 컬렉션 중 하나였으나 쓸 일이 없어서 되팔았다고 한다.[12]
-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지만 깊은 관련이 있는 물건이 또 있는데 '금문고량주'라고 불리는 술이다. 일반 고량주보다 훨씬 독하게[13] 만든 고량주인데 진먼 섬에 주둔하던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인민해방군과의 포격전이 격화되던 시점에는 포격만 시작되면 모두 벙커나 지하로 틀어박혀야 했는데 수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의한 셸 쇼크(Shell Shock)나 폭음 등으로 병사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다보니 사기를 고양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 빨리 취할 게 필요해서 금문고량주를 군 보급으로 마실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현재는 명주로 인정받아 대륙으로 수출까지 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 대만에서는 1986년 이 전투를 다룬 전쟁 영화인 <823금문포격전> (八二三砲戰, The Kinmen Bombs)을 제작, 상영하였다. 내용 자체는 대만군을 찬양하는 전형적인 배달의 기수식 영화지만 전투 장면의 묘사와 스케일은 시대를 감안하면 제법 퀄리티가 높다.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행 S. 응고르(Haing S. Ngor)가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다. 진먼의 중화민국군 지휘부를 방문하는 미국 CIA 요원 역을 맡았다. 홍콩의 액션 배우로 유명한 적룡이 진먼 방어사령부 부사령관인 지싱원(吉星文) 역으로 잠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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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2] 대만[3] 800대를 모두 띄운 것은 아니고 전투에 참여한 총 소티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00여 대 미만이 출동했다.[4]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핵무기가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핵무기는 정확히 10년 후인 1964년에 개발되었다.[5] 국민혁명부터 시작해서 중원대전, 초공작전, 중일전쟁, 국공내전까지 참전한 역전의 명장으로 국공내전에서는 쑤위와 류보청, 예페이 등 인민해방군 소속 명장들을 연달아 격파했고 앞의 구닝터우 전투에서도 진먼방위사령관으로서 진먼에 상륙한 인민해방군을 전멸시킨 주역이었다. 1952년에는 난르다오(南日島)를 기습 공격해 섬에 주둔하던 인민해방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등 인민해방군을 끊임없이 괴롭혀 적 수괴인 마오쩌둥으로부터 "교활하기로는 여우 같고 용맹하기로는 호랑이 같다"는 극찬을 받았다.[6] 당시 제식명은 GAR-8이었다. 당시 불과 1년 전인 1957년 미 공군에 실전배치되었고, 실전 사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나마도 초기엔 숫자가 모자라서 많은 기체에 달지는 못했다.[7] 실제 사이드와인더가 격추시킨 미그기는 4대 정도라고 하지만 사상 최초로 당한 공대공 미사일의 공포 때문에 인민해방군 공군 파일럿들이 충격을 받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세이버의 기총에 격추되었다고 한다.[8]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은 초반 놀라운 전과에 자극받은 나머지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이후 F-4 팬텀기에 기관총을 제거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제공권을 완전히 확보하는데 실패했다.[9] 훗날 이 함정을 기리기 위해서 중화민국 해군의 신형 초계함의 이름은 타강급 초계함으로 명명되었다.[10]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침몰했다고 주장했다.[11] 대한민국 국군이 백령도 및 서해 5도를 요새화시킨 부분도 진먼 포격전의 여파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강력한 방호능력을 갖춘 섬은 공격이 까다롭기 때문이다.[12] 군용 무기로 쓰이는 철강의 품질은 식칼로 만들기에도 최상급이다. 엄청난 열과 압력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철강의 내구성과 신뢰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13] 1958년에 포격전이 일어났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해 58도의 도수로 만든다. 원류는 65도다. 58도는 나중에 상품화하면서 40도짜리와 같이 개발한 것이다. 진먼 현지에서는 65도짜리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