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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과
2.1. 배경
1368년 태조 홍무제에 의해 건국된 명나라는 활발한 대외원정과 내정개혁(영락성세, 인선지치, 홍치중흥)으로 발전해 나갔으나 명 4대 암군의 등장으로 내정이 해이해졌고,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라 불리는 몽골족과 왜구의 침략으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다.한편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는 이미 거대한 세력으로 커진 뒤였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제안하는 등 명나라와 조선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가 요동 지역의 군대(북병)를 조선으로 파병하고, 내부의 반란 진압(만력 3대정)에 정신이 없던 사이에 숙적인 해서여진을 장악하는 등 점차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졌다. 이후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1618년 명나라에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는 명분[1]을 제시하고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시작했다.
2.2. 기나긴 전쟁의 시작
1618년 4월,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이 명나라의 푸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압력을 넣어 지원군을 받아낸 다음 100,000명의 대병력[2]을 편성해 후금의 중심부를 공격했으나 1619년 사르후 대전에서 후금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병력의 절반이 궤멸당하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후금은 승리와 동시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해서여진의 예허부(엽혁부)까지 복속시키며 여진을 완전히 통일하고 1621년에는 요동을 완전히 점령했다.하지만 1626년 원숭환이 이끄는 명군이 영원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산해관 북쪽의 요동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일생일대 최초의 패배를 당해 머잖아 그 충격으로 붕어했다.
2.3. 내몽골 복속과 조선의 제압
한편 몽골의 부족들은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 지역을 휩쓸자,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링단 칸을 버리고 차례로 후금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후금은 몽골을 복속시키기 위해 몽골계 코르친(호르친)부와 손을 잡고 후금의 복속을 거부하던 몽골 대칸의 차하르부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래서 1635년 링단 칸의 아들인 에제이가 대원전국옥새를 태종 홍타이지에게 바치고 항복하게 되어 후금은 몽골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누르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족, 한족, 몽골족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한 후 대청국을 선포했다.몽골을 복속시킨 청나라는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하는 후방의 조선에 불만을 가져 무력으로 조선을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627년에 아이신기오로 아민이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나 조선의 인조로부터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하자, 1637년 태종 홍타이지가 친정하여(병자호란) 인조를 굴복시키고 승리하면서 조선을 완전한 조공국으로 두게 되었다.
2.4. 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
한편 명나라는 청나라의 공격과 내부의 농민반란으로 갈수록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1621년에 사천 지방에서 사숭명(奢崇明)이 난을 일으켰고, 1627년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에 즉위한 의종 숭정제는 기울어진 명왕조를 되살려보려 노력했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장헌충도 봉기했고, 명나라는 청군은 물론 반란군에게도 연전연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642년 명군이 청나라에 대해 대공세에 나선 송금 대전에서도 참패하여 산해관을 제외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청군이 산해관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명나라 조정은 주력군이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붕괴되자 북방을 막는데 급급했고[3] 나머지 지방군들은 농민 반란군에 연전연패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손전정의 관군이 이자성군에게 참패하면서 1644년 4월 25일 이자성군이 북경을 함락하게 되었고,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메고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276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5. 오삼계의 투항과 청나라의 북경 입관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던 오삼계는 반란군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청나라에 투항하는 쪽을 택했다. 1644년 5월 27일, 곧바로 입관한 도르곤의 청군과 오삼계의 연합군은 일편석 대전에서 이자성군을 대파하고 곧 북경을 공격했다. 이자성은 이에 대항했으나 참패했고 자금성에 불을 지른 후 남쪽으로 도주해버렸다.이때 청나라에 볼모로 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대륙의 역사를 바꿀 전투를 지켜봤다. 청군의 기병과 명나라 최정예군의 공격에 이자성의 농민군은 그야말로 갈려나갔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소현세자의 편지와 청나라측의 통지로 기록이 간략하게 나온다.기사, 기사, 소현세자의 편지
승리한 청나라는 이자성과 장헌충을 계속 추격하여 각개 격파했고, 그 잔존세력을 정리하면서 화북을 순식간에 제패했다. 그후에도 분열되어 있었던 남명 정권을 하나하나씩 제거하여 차츰차츰 중국 전토를 정복해나갔다.
2.6. 남명의 멸망
명나라가 멸망했을 때 명의 대신들은 강남으로 피신하여 세력을 구축해 만주족의 청나라에 맞섰다. 그러나 남부지역에 잔존해있었던 남명 세력은 이전에 있었던 강남 망명 정권인 동진 및 남송과는 달리 하나의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기에 서로간의 내분으로 단합하지 못했고 결국 1662년 성조 강희제가 보낸 오삼계가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2.7. 부록: 삼번의 난과 동녕 왕국
청나라에 투항했던 오삼계의 일족은 이후 청나라의 서남부, 즉 운남에서 자치를 누렸으나, 삼번의 난을 계기로 강희제에게 진압당했으며, 남명의 잔당인 대만의 동녕 왕국 역시 펑후해전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시랑에게 대패하여 1683년 강희제에 의해 멸망당했다.[4] 삼번의 난 진압 및 동녕 왕국의 멸망을 계기로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명나라의 한족 잔당들을 일소하고 중국을 완전히 장악했다.3. 영향
3.1. 중국
청나라는 원나라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중국 대륙 전체를 정복한 이민족 왕조가 되었고, 한족들은 몽골족에 이어 만주족을 섬겨야만 했다.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나서 한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풍습인 변발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한족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반대로 가혹한 통치로 인해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의 교훈을 참고했는지 한족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유화책도 실시하여 중국을 200년 넘게 통치할 수 있었다.
한편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하고 나서도 영토 확장을 지속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티베트(1720년)와 위구르를(1755년), 북쪽으로는 몽골을 장악하여 현재의 연해주 일대[5]와 외몽골[6] 및 일리강 지역[7]을 제외한 오늘날 중국 영토의 원형을 확정시켰다.
하지만 만주족에 대한 특혜는 변함이 없었으며 한족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화약무기 개량을 금지했다. 또한 외국과 최소한의 교류를 제외한 쇄국정책을 고수한 결과 근대화에 뒤쳐져 나중에 가면 아편전쟁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문자의 옥 등의 사상 탄압과 한족 탄압정책도 지속적으로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한족들은 큰 불만을 가져 겉으로만 청나라에 충성하고, 속으로는 멸만흥한의 사상을 키우게 되어 이후 백련교도의 난과 태평천국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원나라의 사례를 참고하여 자신들이 한족에게 무너질 때를 대비해 만주 지역을 봉금령으로 설정하여 나중에 만주족의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몽골족과 달리 만주족들은 중원을 정복한 다른 이민족들처럼 한족 문화에 동화되면서 민족성이 약화되었고, 잇단 한족들의 반란과 서양 열강들의 침입[8]으로 주력 군대인 팔기군이 와해되어 군사적인 역량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1911년에 일어난 한족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나서도 독립국을 세우지 못했다.[9] 현재 1,000만 명의 만주족은 자치구도 없고, 자신들의 언어인 만주어도 사멸해가면서 사실상 한족에 동화된 상태에 처해 있다.
3.2. 조선
명청교체기는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수습하던 광해군은 명나라가 멸망할 것임을 짐작하고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후금과 마찰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중립외교를 취했다. 그러나 이것이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사대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10]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인조 정권의 모호한 스탠스를 원치않던 청에 의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여기서 참패하면서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을 당하는 동시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하며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섰고, 조선의 최정예 병력인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투입되어 명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후에도 청나라는 나선정벌에서 조선에 군사와 공물을 수시로 요구했고, 사신들은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조선인들에게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크게 키웠다. 또한 이는 나중에 대중국 멸시 풍조를 만들었다.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이제는 조선이 유일한 중화임을 자처하는 이른바 소중화사상이 퍼지게 되었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사정상 대청 북벌은 무리였다. 북벌론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과 숙종의 치세를 거치면서 북벌론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해야 한다는 북학론이 등장하게 되었고, 훗날 조선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한편 청나라가 만주를 봉금령으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산삼 등을 채취하는 일이 발생하자 청나라가 조선에 항의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청나라와 조선 양국은 모호했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1712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국경을 확정했다.[11]
3.3. 몽골
후금이 내몽골의 차하르부를 정복하여 몽골의 대칸 칭호를 얻으면서 이를 명분으로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 외몽골의 할하부는 내몽골보다 나중에 청나라에 정복되었고, 이는 외몽골과 내몽골이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758년 '최후의 유목제국'이라 불리던 서몽골 오이라트계의 준가르 홍타이지국까지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에게 정복당하면서[12] 몽골족은 완전히 청나라에 복속되었다.1911년에 일어난 한족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인들은 독립을 선언했고, 1921년 외몽골이 소련에 의해 독립했지만 내몽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 자치구로 남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둘의 사이는 좋지 않다.
4. 매체에서
1980년대 초의 수많은 중국 무협, 혹은 한국 구무협들의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이 명청교체기이다. 왜냐하면 이민족이자 오랑캐인 만주족한테 멸망당했다는 한족의 정권인 명나라를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반청 세력들이 무협소설들에 등장하는 비밀 조직의 성격으로 매우 알맞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신무협, 혹은 판협지 세대로 오면서 점차 시대극 및 가상역사물의 색채가 옅어지면서 사라졌고, 무협 웹소설의 시대에 와서는 아예 '중세 중국'이라는 형태만 유지할 뿐, 시대 구분이 모호하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 소설들이 늘어났다.김용의 <벽혈검>과 <녹정기>, 전통 사극 웹툰인 칼부림의 배경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4부에선 명말청초의 주역인 원숭환과 누르하치 등이 주역으로 활약한다.
<애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한 만화, <애기 명나라 둘리>가 존재한다.
5. 관련문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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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대한으로 불리며 한국어 위키를 참조해보자[2] 명군 약 90,000명, 조선군 약 10,000명.[3] 청나라는 만리장성과 산해관을 쭉 우회하여 산동성까지 쳐들어와 덕왕 주유추를 잡아가기도 했다. 위 동영상 5분 17초경. 이때 명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4] 이후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었던 다두 왕국까지도 청나라의 군사 작전에 의해 멸망했다.[5]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할양.[6] 소련에 의해 독립.[7] 러시아 제국이 야쿱 벡의 반란을 틈타 1871년에 점령하고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할양받았다.[8] 특히 러시아 제국은 발원지인 만주 지역을 위협하여 외만주 지역을 할양받았고, 이에 위기를 느낀 청나라가 만주 지역의 인구를 늘려 청나라의 영토로 확실하게 지배하고자 봉금령을 해제하여 조선과 간도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9]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선통제를 황제로 내세운 만주국을 세웠으나 이는 일제의 괴뢰국에 불과했으며,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멸망했다.[10] 인조반정의 주역이 서인이기에 흔히 서인만 반발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이이첨 등 대북파조차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혼자만의 정책에 가까웠다. 자세한 바는 광해군/평가 항목 참조.[11] 하지만 토문강이 어떤 강인지를 놓고 조선은 송화강의 지류, 청나라는 두만강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훗날 간도 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12] 멸망 당시 준가르족이 청군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과 전염병으로 사실상 절멸되면서 그 자리에 위구르족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