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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감국 | |
<colbgcolor=#bf1400><colcolor=#f9d537> 명 11대 노왕 주이해 | 朱以海 | |
출생 | 1618년 |
사망 | 1662년 (향년 44세) |
시호 | 없음 |
연호 | 감국노(監國魯, 1646년 ~ 1653년) |
봉호 | 노왕(魯王) |
성씨 | 주(朱) |
휘 | 이해(以海) |
자 | 거천(巨川) |
부왕 | 노숙왕(魯肅王) 주수용(朱壽鏞) |
모후 | 왕씨(王氏) |
재위 | 명 노왕 |
1644년 ~ 1662년 | |
남명 감국 | |
1646년 ~ 16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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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명의 제후왕으로 섭정에 해당하는 감국을 지냈다. 자는 거천(巨川)이었고, 호는 항산(恒山)이었다.2. 생애
노숙왕(魯肅王) 주수용(朱壽鏞)[1]의 5남이자 태조 홍무제의 10남 노황왕(魯荒王) 주단(朱檀)의 9세손이었다. 황위에는 직접 즉위하지 않고, 스스로 감국(監國)[2]이라고 칭했으며 보통 노왕이라고 부른다. 다만 간간히 비정통 황제로 보기도 한다.1644년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다. 제13대 신종 만력제의 손자였던 복왕 주유숭이 홍광제로 즉위하고 남명을 세우자 노왕에 봉해졌다. 1645년, 남경의 홍광제가 청군에게 패배하자 절강성의 소흥에서 감국을 칭했다. 이때 명나라 황실의 먼 친척뻘이었던 당왕 주율건이 복주에서 융무제로 즉위했는데, 주율건의 정통성에 대해서 대립했기 때문에 그의 연호였던 융무를 쓰지 않고, 감국노(監國魯)[3]라는 연호를 칭했다.이렇게 감국 주이해와 융무제 주율건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대립하는 사이에 1646년 절강과 복건이 연달아 함락되고 융무제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때 주이해는 주산(舟山)으로 피신해 1651년 정성공의 비호하에 들어갔다. 이후 남명의 제3대 황제인 영력제 주유랑의 정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다가, 1662년 11월 금문(金門)에서 사망했다.
3. 기타
감국이었던 노왕 주이해의 능은 1959년 진먼현에 포 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963년에 타이우산 근처에 새롭게 능을 조성했으며, 매년 진먼현 정부에서 주이해의 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1] 1639년 청나라 군대가 연주를 함락시킬 때 전사했다.[2] 즉위 예정인 군주가 즉위 전에 쓰는 임시 칭호라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었는데, 고려의 대비(大妃)였던 정비 안씨(定妃安氏)가 역성혁명파 관원들의 압박에 굴복하여 공양왕을 폐위한 뒤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었다. 그리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새로 즉위한 왕은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낼 때 자신을 조선 국왕이라 칭하지 않고,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칭했으며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후에야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조선 국왕이라고 칭했다. 감록국사와 권지국사는 주이해가 칭한 감국과 비슷한 개념이었다.[3] 감국인 노왕이 임시로 다스리고 있는 해라는 뜻에서 감국노라는 특이한 연호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