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2:46:36

대만청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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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ᡨᠠᡳᠸᠠᠨ | 臺灣
파일:청나라 국기.svg
국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1894_Taiwan.svg.png
1683 ~ 1895[1]
성립 이전 독립 이후
동녕국 대만 민주국
다두 왕국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위치 타이완섬 해안, 펑후 제도
수도 대만부(臺灣府, 1683~1885)
대돈(大墩, 1885~1887)
대북부(臺北府, 1887~1895)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정부수반 순무(巡撫)
언어 만주어, 중국어, 대만어
문자 만주 문자, 한자
종교 도교, 유교, 대승 불교
종족 만주족, 한족(본성인), 대만 원주민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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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행정구역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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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가 1683년 동녕 왕국을 멸망시킨 때부터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섬을 할양할 때까지를 지칭한다. 한자로 청조통치시기(淸朝統治時期), 대만청치시기(臺灣淸治時期)라고도 한다.

템플릿에 사용된 지도는 1894년 당시 청의 타이완 섬 점유를 나타낸 지도로, 타이완 섬 내륙은 대만 원주민들의 영역이었다. 섬 전역을 지배하에 넣은 나라는 일본 제국최초이다.[2]

2. 상세

동녕국타이완섬을 거점으로 존속 내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고수하며 청나라에게 끊임없이 저항하였으며 청나라 역시 무력을 동원하여 동녕국(명정시기)과 싸웠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동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렇게 동녕국을 멸망시키고 타이완 섬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청나라는 타이완섬푸젠성으로 편입하고 타이난시를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청 정부는 타이완섬이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들의 타이완 섬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전근대의 모자란 행정력 때문에 한족들의 불법 이주가 판을 쳤다.[3] 불법적으로 건너간 한족들의 배가 난파되어 시신으로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당시의 타이완은 대륙에 비해 발달이 덜 된 험한 곳이다 보니 남성들이 주로 건너가서[4] 섬의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져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게 되었다.

이주한 한족들은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타이완 섬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한족과 대만 원주민[5]의 경계인 '번계(蕃界)'를 정해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금했지만, 한족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한족들이 점차 번계를 넘어 원주민 영역에서 건축과 농사를 짓고, 시간이 흘러 번계가 재조정되어 원주민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 또 원주민 영역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사서 건축이나 농사를 지은 한족들도 있었지만 원주민 토지를 강탈한 한족들도 있었다.[6]

이렇게 한족의 생활영역과 원주민의 생활영역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타이완 섬 한족 주민의 남초현상이 심각했기에, 한족 남성들이 주로 평야지대의 대만 원주민 여성들과 혼인하여 대만 원주민의 한족 동화가 촉진되었다.

1717년 청나라는 모든 남양무역을 금지했고 타이완 섬에서는 중계무역이 단절되어 손해가 막심하였다. 1727년 이 무역금지 조치는 해제되고 남양무역이 다시 개방되었으나 대만은 대외무역항에서 제외되었다. 청의 이러한 타이완 섬 탄압은 타이완 섬이 다시 서양세력의 무역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시행되었다.

청의 의도대로 타이완섬은 국제무역망에서 벗어났으나 중국 대륙과 일정한 교류는 지속되었으며 시간이 흐르자 증가하는 경향이 보였다. 또한 타이완 섬의 동남아무역도 어느정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1720년에는 청나라에 거주하는 한족들이 자칭 명나라 황족의 후예라는 주일귀를 대명황제로 받들고 난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1732년, 옹정제 통치 시기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타이완 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이 멸망당했다. 그렇게 그들의 영토였던 곳은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른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시를 점령하고 맺은 톈진 조약(Treaty of Tientsin)의 영향으로 1865년 타이완섬이 개항되었다. 항구개항으로 타이완 섬은 다시 국제무역망에 포함되었다. 이후 타이완 섬은 차, 설탕 등을 수출하면서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아울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일제류큐 왕국 병합으로 타이완 섬은 갑작스럽게 최전선이 되자 청나라에서는 대외 방어의 전초 기지로서 타이완 섬의 역할에 주목해, 타이완 섬을 복건성(푸젠 성) 관할에서 새로 설치한 대만성(타이완성) 관할로 하고 성도(省都)를 타이난이 아닌 타이베이시에 두었으며, 당시 청나라의 근대화 정책과 맞물려 철도가 부설되고 전등이 설치되는 등 근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1895년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일본 제국에게 패배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 발효되었다. 조약의 결과 타이완섬과 펑후 제도는 일본 제국식민지가 되었다. 이로써 청의 타이완섬 통치는 종료되었다. 타이완섬의 한족들은 이에 저항하여 대만 민주국을 수립하고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 저항이 실패하면서 타이완섬은 일본 제국의 영향권 하에 완전히 포함되었다.

청나라는 타이완섬을 200년 넘게 영유했다. 그럼에도 타이완 섬을 일본에 양도하기 직전인 19세기 말을 제외하면 청나라는 타이완 통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타이완섬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될 정책도 여럿 추진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청나라에 대한 귀속감은 크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이 타이완섬을 영유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비해 이 지역에서는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타이완섬을 통치한 국가라 할 만한 정치체제 중 청나라의 통치가 가장 길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대만인들은 중국인 정체성이 약한데, 청나라가 보여준 무관심도 그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3. 행정구역

청이 동녕국을 복속시킨 후 1684년에 지금의 타이난, 가오슝 일대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인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하여 복건성 휘하에 두고 대만부 산하에 대만현(臺灣縣), 봉산현(鳳山縣), 제라현(諸羅縣)의 3개 현을 설치하였다. 이후 점차 청의 통치가 타이완섬 북부로 확장되면서 현이 지속적으로 신설 및 재편되었고, 1875년에는 대만부에서 대북부(臺北府)가 분리되어 2개 부 휘하에 8현 4청을 관할하였다. 1885년에 대만성이 신설된 후 1887년에 대만부에서 대남부(臺南府)와 대동직례주(臺東直隸州)를 분리하고 현을 재편하여 3부 11현 3청 1직례주를 관할하였다.

아래 표는 1894년 대만성의 행정구역이다. 부(府)와 주(州)는 명청대에 존재한 성과 현 사이 중간단계의 지위를 가진 행정구역으로, 현대 중국 행정구역 체계의 지급행정구와 유사한 기능을 하였다. 여기서 부는 반드시 복수의 현을 관할하였으나, 주는 그렇지 않았다.
행정구역(3부 11현 3청 1직례주)
대남부(臺南府) 안평현(安平縣), 봉산현(鳳山縣), 가의현(嘉義縣), 항춘현(恆春縣), 팽호청(澎湖廳)
대만부(臺灣府) 대만현(臺灣縣), 창화현(彰化縣), 묘률현(苗栗縣), 운림현(雲林縣), 포리사청(埔里社廳)
대북부(臺北府) 담수현(淡水縣), 의란현(宜蘭縣), 신죽현(新竹縣), 기륭청(基隆廳), 남아청(南雅廳)[7]
대동직례주(臺東直隸州) 하위 행정구역 없음

4. 참고 문헌

  • 조세현, "해양을 통해 본 대만사 - 대만학계의 연구현황을 중심으로", 2016


[1] 위 지도는 1894년의 행정구역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유채색으로 나타낸 구획이 현 또는 청이다. 동부의 회색으로 칠해진 넓은 영역은 대동직례주의 관할 구역이고, 검은색으로 표시된 내륙 산악지대는 청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이 곳에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지 않았다.[2] 영토 크기와 인구 규모에 큰 차이가 있지만, 이 점은 묘하게 영국인도 제국과 닮아 있다. 인도도 (영국령이 아니었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통일을 대영제국의 통치 시기에 이루었다.[3] 이들은 대개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나 나라에 찍힌 해적들이었기에 어차피 이주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 청나라에서는 타이완 섬에 한족들이 눌러앉는 것을 막기 위해 남성만 이주를 허락하고 여성의 이주를 금지했던 적도 있다.[5] 당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멸시 의식에서 생번(生蕃)이라 하였다. 이렇게 한족의 문명을 받아들인 이들을 '숙-', 그렇지 않은 이들을 '생-'이라고 하곤 했다. 여진족에 대해서도 '생여진', '숙여진' 등의 말이 쓰였다.[6]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7] 설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