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1:51:21

보갑제(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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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식민지 대만의 보갑제4. 만주국 보갑제5. 해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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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이 만주국식민지 대만에 설치한 주민 조직이자 주민 통제 기구.

2. 특징

보갑제(保甲制)란 중국의 전통적인 가구를 묶는 조직으로 중국 문화권 전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걸 통치에 활용했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여러 가구가 하나의 단위로 묶기고, 그 단위 내 구성원이 법을 어기면 한 단위의 구성원 전체에 연대책임을 묻는다. 전근대 중국 문화권의 경우 이런 식의 연대책임을 통한 주민 통제 말고도 주민끼리 규약을 맺는 등의 자치 기능도 있었는데 일본 식민 당국은 주민 통제에 초점을 맞춰 제도를 존속시킨다.

3. 식민지 대만의 보갑제

대만의 보갑제는 대만청치시기에도 존재했으며, 일본 통치기에도 이를 통치에 활용했다.

1898년에 공포된 보갑조례에 따르면 대만의 경우 10호를 1갑, 10갑을 1보로 삼았다. 갑은 호구조사, 마을 출입자 감시, 범죄 경계 및 수사, 보안림 보호, 전염병 예방 등의 임무를 맡았다.

대만 내 보갑제의 경우 연좌제에 따라 보갑제 체제 내의 가장은 가족의 동태를 감시하고, 가장은 가장끼리 감시하고, 갑장은 갑장끼리, 보 내의 장인 보정갑장은 서로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식민통치 기간 일본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을 막고 주민을 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반대로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다. 1920년대 일본 식민통치가 온건해졌을 때 대만 민중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보갑제 폐지였을 정도.

1945년 6월 2차대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외지동포의 처우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보갑제를 폐지했다.

4. 만주국 보갑제

1933년 12월에 만주국에 공포된 잠행보갑법에 따르면 10호마다 패(牌)를 조직하고, 패를 모아서 촌내 갑(甲)을 만들어, 그위에 경찰서 관내의 갑을 모아서 보(保)를 삼는다. 이에 경찰서장 - 보장 - 갑장 - 패장 - 각호라는 지휘감독 계통이 만들어 진다. 형법의 내란·외환·공공위험죄나 징치반도법·동도비법 등을 위반하는 자가 패 안에서 나올 때 각호의 가장에게 연좌제로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보·갑은 경찰서장의 지휘감독 아래 자위단을 조직한다.

1934년 12월 창설 당시 983개 경찰서 아래 1,267보, 2만 2,403갑, 31만 4,306패가 있었고 565만호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최초에는 치안조직이였지만 점점 행정조직화 된다. 1937년 12월의 시·가·촌제 공포 후는 보갑제가 가촌제로 개편된다.

또한 항일 운동 세력들에게 식량, 의복, 인적 자원의 공급처가 될 수 있는 산간 마을을 폐쇄하고, 새로 건설된 집단 부락은 일제의 치안 숙정이 강화되면서 주로 간도·지린성 등 동부 산악지대에 이루어졌다. 집단 부락 규모는 대체로 100호~200호 정도로 정방형으로 건설됐다. 100호를 수용하는 표준 집단부락의 경우, 부지는 가로, 세로 각 100간(182미터), 면접 1만 평에, 주위 사방에는 2.5m의 높은 담을 쌓고 네 모퉁이에 포대를 설치했다. 또한 담 위로는 가시철조망이나 전기철조망이 부설됐으며, 담 바깥으로는 폭 3미터, 깊이 2미터의 호까지 만든 하나의 요새였다.

주민에게는 양민증이 발부 됐고 양민증이 없으면 반일분자 또는 통비분자 혐의로 바로 체포됐다. 부락 바깥으로 나가는 대문은 하나로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아예 문을 닫아야 했다. 만주에서 산다는 것은 하루 하루가 전투였다.

이들이 집단부락으로 모이고 난 후 빈자리인 산간부에서는 거주나 경작은 금지되었고, 무주(無住)지대로 하거나 일본인 이민을 거기에 입식시키는 방법이 취해졌다. 반대로 집단부락의 경우 좁은 지역에 인구가 몰리고 농지가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일본 측은 그 딴 거야 뭐 자기들 알 바 아니었다.

집단부락은 1935년도 1,172개, 1936년도 3,361개, 1937년 4,922개로 해마다 늘어나 건설이 완료되어 가는 1939년도 말에는 무려 1만 3,451개소에 달했다.

효과는 뛰어나 만주국 민간인과 항일 저항세력의 연락을 끊는 데 현저한 효과가 있었다. [1]

5. 해체

만주쪽에 있는 보갑제 조직들은 소련군과 몽골인민군이 쳐들어 오자 별 저항도 못 하고 관동군, 만주군과 함께 싸그리 탈탈 털려 사이좋게 괴멸 당한다. 잡힌 인원들은 소련군에 의해 노동으로 혹사 당하거나 귀국을 늦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만 쪽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서 인지 국민혁명군에게 투항되어 운이 좋으면 바로 귀국 하거나 운이 안 좋으면 현지에 남았다고 한다.

6. 기타


[1] 동북항일연군 등 공산주의 계열 저항세력에 투신했던 공산주의자들은 훗날 만주국의 보갑제가 적잖은 곤란과 어려움을 야기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