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陵 盜掘 事件
Looting of the Eastern Mausoleum
1. 개요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 중 '도굴장군'으로 불리는 군벌 쑨뎬잉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청동릉을 도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사건으로 서태후와 건륭제의 무덤이 도굴당했다.[1] 푸이가 중화민국에 학을 떼고 일본 제국에 붙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2. 배경
쑨뎬잉 | 국민당의 2차 북벌 |
6월 29일 장쭝창의 부하인 서원천과 함께 계현으로 퇴각한 쑨뎬잉은 더 이상 봉천군벌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결국 쑨뎬잉은 장제스의 심복 하성준으로부터 국민정부에 투항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쑨뎬잉은 봉천군벌을 배신하고 국민혁명군에 투항하여 국민혁명군 육군 6군단 1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서원천은 6군단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계현의 사찰에 12군 사령부를 설치한 쑨뎬잉은 군량미 문제를 논하기 위해 준화, 옥전, 계현의 관료와 유지, 상인들을 불러 식량을 요구했지만, 척박한 하북 지역에 많은 군벌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던지라 이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이에 성난 쑨뎬잉이 이들을 윽박지르면서 식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때 준화현에서 온 사람이 토비 마복전이 동릉을 도굴해서 12만 원어치나 되는 금은보화를 훔쳐 베이징에 팔아 막대한 돈을 챙긴 일이 있다고 말했다.
원래 이 사람의 의도는 이 정도로 토비가 설쳐대서 준화현 사람들이 식량을 댈 수 없다는 의미였지만 쑨뎬잉은 무덤 하나를 파헤쳐서 무려 12만 원이 나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동릉을 지키는 군사가 있는지 여부를 물은 쑨뎬잉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군이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내일부터 우리 군이 지역의 소요를 막고 토비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겠습니다. 여러분은 군량만 조금 협조해주면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유지들은 알았다고 하고 물러났다.
쑨뎬잉은 즉각 휘하 사단장 담온강을 불러 동릉 근처 마신교에 병력을 배치하고 동릉을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담온강은 휘하 연대장 조종경 등 10여명과 함께 말을 타고 동릉을 둘러보았다. 원래 동릉에는 북양정부가 파견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북양정부가 와해된 후 관할권이 국민정부로 넘어갔지만 대혼란 와중에 아직 국민정부는 동릉을 수비할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릉을 둘러싼 나무는 죄다 베어진 후였고 건물들은 헐려 값진 것은 죄다 약탈당했다. 담온강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쑨뎬잉은 개같은 놈들이 죽은 사람에게서 돈을 벌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욕을 퍼부었는데 담온강은 땅 위의 것은 죄다 털렸지만 땅속의 것은 남아 있으니 도굴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쑨뎬잉은 자신들이 손을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털리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동릉을 철저히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3. 전개
3.1. 토비 소탕
1928년 7월 1일 담온강은 부하들에게 쑨뎬잉의 지시를 전달하고 지역 경찰서와 민단에게 연락해 토비들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주변의 정세를 살폈다. 당시 동릉 근처에는 봉천군벌의 패잔병, 국민혁명군 3군 휘하 사단, 마복전의 토비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담온강은 마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날 밤 마복전의 토비들이 황릉을 도굴하기 시작했다.놀란 담온강은 15연대, 계현 민단, 서23보위대, 권총부대를 파견해서 토비들을 격퇴했다. 마복전은 중과부적으로 달아나 버렸고. 담온강은 사로잡은 토비들을 총살하고 효수하여 석패루 앞에 내걸었다. 이어 쑨뎬잉은 토비를 막고 능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담온강과 유월정의 2개 부대를 동릉에 배치하고 능원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봉쇄하는 한편 능원 지구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알림. 마란욕에 토비들이 창궐해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고 강간에 살인까지 저질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본 군단장은 지역민의 요청으로 특별히 군대를 파견하여 토비들과 일전을 벌였다. 용맹한 병사들 덕분으로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토비를 죽였고 사로잡은 일당 30여명도 군법에 회부하여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아직 잔당이 적지 않으므로 마을과 산속을 샅샅이 뒤져 이번 기회에 그들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 주민들은 토비가 은닉한 장소를 발견하거나 그에 관한 정보를 들으면 즉시 인근 부대로 신고해주기 바란다. 본 군단장은 머리를 자르고 입대한 이래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히 하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토비가 남아 있는 한 백성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 본 군단장이 토비를 일망타진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토비 소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지문의 내용을 서로 알려주기 바란다. 이상. 국민혁명군 제12군 군단장 쑨뎬잉 중화민국 17년 7월 3일 |
동릉을 완전히 장악한 쑨뎬잉 부대는 동릉의 폐허에 남은 금은과 쇠붙이를 수거하는 한편 토비의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100개 촌락을 뒤져 닥치는대로 물건을 빼앗았다.
3.2. 도굴 준비
그런데 동릉 인근에 혁명군 8군 7여단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군대가 나타나면서 쑨뎬잉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쑨뎬잉은 휘하에 담온강, 풍양전, 양랑선 등을 소집하여 도굴 시기에 대해 논했다. 담온강은 입안에 들어온 고기를 뱉을 수 없다는 이유로 즉시 도굴하자고 주장했으나 양랑선은 어디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어느 능에 보물이 제일 많은지, 제일 값진 보물은 어느 능에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반대했고 도굴이 끝나는 대로 철수하면 토비와 지역 주민들이 드잡이를 할 것이니 죄를 토비들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쑨뎬잉과 풍양선, 담온강은 모두 양량선의 주장에 감탄했지만, 어느 무덤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상부의 명령 없이 철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양랑선은 예전에 능원을 지키던 묘지기들과 능묘의 공사를 맡은 기술자와 일꾼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으니 이들을 족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며 서원천에게 뇌물을 주면서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소연하면 철수 허락을 맡는 것도 쉬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랑선은 효율적인 약탈을 위해 능묘 부장도까지 구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쑨뎬잉은 담온강에게 능묘 지하궁을 수색하게 하고 결과 여부와 상관없이 베이징의 서원천을 만나 철수 허락을 맡기로 하였다.
그날 밤 담온강은 10여명의 호위병과 함께 동릉을 뒤져 묘지기 노인 두명을 찾아냈다. 담온강은 묘지기들을 위협했으나 묘지기들은 순치제의 무덤은 텅텅 비었지만[2] 강희제, 건륭제, 서태후의 무덤은 그들의 위세에 걸맞게 값진 물건이 많다고 들었다는 썰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러자 담온강은 원대두 은화 두 닢을 주면서 묘지기들에게 지하궁 입구와 부장품을 잘 아는 사람을 알고 있지 않냐고 구슬렀는데 묘지기들은 낭중을 지낸 함풍제의 정릉지기 출신의 소필탈림이라는 자가 잘 알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담온강은 군사를 파견하여 소필탈림의 거처를 감시하게 하는 한편 계현의 쑨뎬잉 사령부로 돌아가 쑨뎬잉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양랑선도 서원천을 만나고 온 일을 보고하고 장제스가 군축을 실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렸다. 게다가 마복전이 달아나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토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도 힘들어 보였지만 양랑선은 여기저기에 봉천군벌의 패잔병이 많으니 이들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라면서 조속히 도굴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날 오후 3시 쑨뎬잉은 긴급 장령회의를 소집하여 편견회의 소식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을 모욕한 지가 근 300여년이다. 그들의 황릉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 한족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손중산이 만청의 운명을 바꾸고 풍옥상이 선통제의 운명을 바꿈으로써 산 자의 청나라는 이미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황릉을 무너뜨림으로써 죽은 자의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뜻을 이어 혁명을 완수할 것이다."
이어 참모장 풍양전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발표하여 담온강이 서태후릉을, 시운승이 건륭제릉을, 정발정이 강희제릉을 도굴하게 하고 유월정이 봉천군벌 패잔병 소탕을, 양명경이 능원의 경계를, 전손자유가 능묘 도굴 작업을 지원하게 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각 부대는 즉시 동릉으로 이동하여 동릉 주변 30리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3~5걸음마다 보초를 배치했으며 능원 사방에 따발총, 박격포 등 중화기를 두어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쑨뎬잉은 부하들이 보물을 빼돌릴 것에 대비해서 심복들을 각 부대에 투입했으며 능묘에서 나온 일체의 보물은 값어치를 막론하고 마신교의 임시사령부에 보내서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하였고 사사로이 보물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3.3. 서태후릉 도굴
서태후릉의 모습과 지하무덤 내부 |
청나라가 망한 후 가난하게 살던 소필탈림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명루 아래의 유리벽 앞쪽만 파면 된다고 즉시 지하궁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병사 수십명이 달려들어 유리벽 아래를 파기 시작했는데 단단한 석판이 나타나면서 더 이상 굴착이 불가능해졌다. 병사들이 괭이와 삽으로 철판을 두들겨댔지만 철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필탈림은 그것이 지하궁 입구를 막고 있는 '금강장(金剛墙)'이라고 설명했고 공병대장 전손자유가 폭탄을 설치해서 금강장을 날려버렸다.
연기가 가라앉고 시야가 확보되자 쑨뎬잉은 20명의 병사를 지하궁으로 투입했다. 병사들은 2열 종대로 전진했는데 앞쪽 8명이 장총으로 무장했고 뒤의 12명은 도끼, 삽, 괭이,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경사로가 매우 가팔라서 병사들은 무릎을 반쯤 꿇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했다. 경사로 끝에 다다르자 눈알이 튀어나오고 입이 쫙 찢어진 괴물의 머리가 새겨진 순백의 한백옥 대리석 대문이 앞을 막았는데, 병사들이 힘껏 밀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3] 결국 수십분간의 실랑이 끝에 통나무를 구해서[4] 문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몇 걸음 후에 한백옥 대리석 대문이 또 나타나자 전손자유는 그 대리석 대문도 통나무로 부숴 버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안치된 서태후의 관이 드러났는데, 전손자유는 담온강의 지시를 받기 위해 지하궁에서 철수했다. 이때가 7월 9일 심야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담온강은 즉시 관을 부수라고 지시했다.
다시 지하궁으로 들어온 전손자유는 도끼와 곡괭이로 서태후의 곽을 박살내 버렸다. 바깥의 외곽[5]이 부서지자 그 안에 붉은 칠에 금을 바른 관이 드러났는데, 공병들이 도끼로 관을 부수려고 하는 순간 담온강의 부관이 보물이 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저지했다. 병사들은 도끼와 총검으로 관뚜껑에 구멍을 낸 후에 구멍에 괭이를 넣고 아예 관뚜껑을 엎어버렸다. 관뚜껑이 열리자 서늘하고 음산한 회색 기체가 쏟아져나왔다. 기겁한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연장을 떨어뜨리며 물러섰고, 관은 구르릉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서태후의 시신이 덤빌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던 병사들은 오줌까지 싸면서 패닉에 빠졌다. 귀신은 무서웠던 전손자유와 유 부관 역시 시신이 덤벼들 것을 대비해 기관총까지 배치해놓고 다시 병사들에게 관뚜껑을 열라고 지시했다.[6]
관을 다시 열자 이번에는 매캐한 냄새만 나고 연기는 나지 않았다. 서태후의 시신은 살아 있는 듯했으나 잠시 후 외부의 공기를 쐬면서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솨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수축하더니, 분홍빛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더니 자주색에서 다시 검은색으로 변했다. 은은히 감고 있던 두 눈은 움푹 들어가면서 이마는 툭 튀어나오고 곰팡이가 변해 흰 털이 한 치나 자란 손도 바싹 쪼그라들고 꾹 닫고 있던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이빨도 훤히 드러났다.
이때 병사 한 명이 서태후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환영을 보고 기절해 버렸다. 놀란 전손자유는 소총과 연장으로 관뚜껑을 막아 버렸으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서태후의 시신을 바깥으로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서태후가 살아있다고 넋을 놓은 병사를 분풀이로 걷어차더니 그 병사를 서태후의 시신 위로 던져 버렸다. 이어 전손자유는 서태후 관곽에서 다음과 같은 보물을 꺼냈다.
- 비취로 조각한 말 조각 6개.
- 18금 나한
- 산호수
- 화려하게 장식된 보석으로 만든 앵두나무 가지. 가지 위에는 얼룩 깃의 옥으로 만든 새가 앉아있었다.
- 옥과 비취로 조각한 연근과 배추.
- 보석으로 조각한 수박
- 보석으로 조각한 포도가 담긴 보석 옥안(玉碗)
- 붉은 보석을 깎아만든 대추, 노란 보석으로 만든 배
취옥백채(翠玉白菜).[7] | 서태후의 관 내부를 재현한 모형 |
잠시 후 양랑선이 무덤에 묻힌 부장품들이 기록된 목록을 꺼내왔다. 병사들이 발견한 보물들과 부장품 목록을 하나하나 대조해보던 양랑선은 아직 서태후가 그토록 자랑하던 18알의 진주 팔찌를 찾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병사들이 관을 치워버리자 보물이 더 숨겨진 우물 '금정(金井)'[8]이 드러났다. 병사들이 금정을 뒤지자 그 밑에서 18할의 진주가 박힌 팔찌, 옥 여의, 산호 염주, 금불, 옥불, 황금 상감 주전자, 옥잔, 벽옥 노리개, 황금 팔찌 등 진귀한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병사들은 이 보물들을 죄다 쓸어담아 상자에 넣고 무덤 밖으로 올려보냈다.
지하궁에서 쏟아져나온 보물을 보고 흥분한 쑨뎬잉과 담온강은 직접 내려가서 지하궁을 살폈다. 쑨뎬잉이 정신을 잃은 병사를 보고 '저놈은 뭐하는 놈이냐'고 묻자 유 부관과 이덕록은 '서태후가 살아있는 줄 알고 미쳐버린 병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쑨뎬잉은 미친놈이라고 욕하면서 병사를 걷어찼는데 병사가 서태후의 시체 위로 쓰러지면서 그 반동으로 서태후의 입에서 강력한 쪽색 빛깣이 뿜어져나왔다. 그 빛이 워낙 영롱하여 지하궁 전체를 비추고 30걸음 바깥까지 환하게 비췄다.
놀란 유 부관이 빛의 정체가 야명주라고 소리치자, 담온강이 흥분해서 그런 귀한 물건을 죽은 할멈에게 맡길 순 없다며 유 부관에게 서태후의 입에서 야명주를 꺼내라고 지시했다. 유 부관이 손가락을 집어넣자 야명주는 식도로 굴러들어갔는데 유 부관은 다급한 마음에 초검을 서태후의 입 안으로 쑤셔넣고 목구멍까지 찢어버렸다. 유 부관은 서태후의 시신을 넋나간 병사의 등 위에 거꾸로 올린 뒤, 서태후의 머리채를 잡고 시체의 목덜미를 수차례 후려쳤다. 그러자 달걀만한 야명주가 서태후의 입에서 떨어졌고 지하궁 안이 다시 환해졌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여인의 최후라기엔 지나치게 비참했던 셈.
어느 정도 값진 보물들을 죄다 챙겨넣은 전손자유는 남은 보물들은 병사들이 알아서 가지도록 했다. 당연히 보물에 눈이 돌아간 병사들 사이에서 대판 싸움이 일어났다. 전손자유는 서로 총까지 쏘면서 고함을 지르는 병사들을 뒤로 한 채로 무덤 밖으로 나오던 중, 갑자기 서태후의 시신이 입고 있던 옷이 떠올랐다. 분명 그 옷도 꽤나 값어치가 나가는 보물일텐데 그걸 챙기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전손자유는 다시 무덤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참혹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는데, 서태후를 감싸던 용포는 이미 갈기갈기 찢겼고 쓰고있던 관은 병사들의 발아래 납작하게 눌려있었다. 심지어 저고리, 바지, 신발, 버선까지 모조리 벗겨낸 탓에 서태후의 시체는 붉은색 속바지와 발끝에 씌운 양말 빼고는 알몸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어떤 병사는 벗겨낸 저고리와 바지에서 미친 듯이 보석을 뜯어내고 있었고, 어떤 병사는 보석을 찾겠답시고 서태후의 알몸을 번쩍 들어 머리카락, 입, 음부까지 손을 넣고 뒤적였다.
무덤 내부를 초토화시킨 전손자유는 정말 모든 걸 싹싹 쓸어담은 뒤 무덤을 빠져나왔다. 일행들이 나오자 이번에는 또 밖에서 경계 서고 있던 병사들이 또 한번 무덤 내부로 쳐들어가서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보석을 찾겟답시고 관을 집어던지고 시체를 헤집어놓으면서 확실하게 능욕했다고. 한편 무덤의 입구를 안내해준 소필탈림은 함풍제의 정릉 북쪽에 파놓은 구덩이로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맞은 채로 묻혔다. 관계자의 입을 막기 위한 전손자유의 명령이었다.
3.4. 건륭제릉 도굴
건륭제의 무덤 유릉(裕陵)의 전경과 내부 |
유리벽 아래를 수직으로 12m 정도 파내자 서태후릉처럼 똑같이 금강장이 나왔고, 이 테두리를 따라 다시 3m 정도 더 파내자 드디어 입구가 나왔다. 마침내 입구를 발견한 시운승은 심복 한대보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다. 한대보는 일단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용감한 2명의 병사들을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하지만 한대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지하무덤 내부 전체가 1.5m 깊이의 지하수로 가득 침수되어 있었다는 것. 병사들은 입구로 들어가 15m에 달하는 지하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려 했는데, 이 경사로에서 미끄러져서 오수에 익사하고 말았다.[9]
두 병사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초조해진 한대보는 담온강이 했던 것처럼 입구를 아예 폭탄으로 날려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입구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폭약을 묻어 폭발시켜버렸지만, 워낙 금강장이 단단해서 생각만큼 효력이 나지 않자 폭파는 포기하고 하나하나 벽돌을 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어느 정도 입구가 넓어지자 다시 2명의 병사들을 내려보냈는데,[10] 병사들은 내려가자마자 앞서 내려간 병사들의 시체와 무덤에 가득찬 물을 보고 기겁한 채 올라왔다. 보고를 듣고 난감해진 시운승은 톈진까지 사람을 보내 물을 빼낼 양수기를 사오도록 지시했다. 하루만에 다섯 대의 양수기를 가져온 한대보는 3시간에 걸쳐 물 대부분을 빼냈다. 물을 빼낸 한대보는 서태후릉을 도굴할 때처럼 통나무를 베어들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보살상이 새겨진 대리석 문짝 | 석실과 건륭제의 석관 |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문이 아예 터져나가버리자 왜 문이 도저히 열리지 않았는지 이유가 드러났다. 무덤 내부에 물이 너무 많이 고이는 바람에 관이 물 위에 둥둥 떠버렸고, 밖에서 양수기로 물을 빨아들이자 물 위에 떠있던 이 관들이 물의 흐름을 따라 석문 뒤쪽까지 흘러와 문 뒤에 착 붙어버린 것이다. 육중한 관들이 석문 뒤에 착 붙어서 버티고 있었기에 아무리 통나무로 들이받아도 열리지 않았던 것. 폭탄이 터지자 문 뒤에 있던 관들 위로 석문이 넘어져 관을 깔아뭉갰다. 뭔짓을 해도 그 석문을 관 위에서 치우는 건 불가능했던지라 한대보는 관을 도끼로 찍어서 그 틈새 사이로 부장품들을 꺼냈다. 뭔가 번쩍거리거나 비싸보이는 건 죄다 꺼내서 챙겼고, 쓸모없어보이는건 그냥 더러운 물 속에 던져버렸다.
석문 아래 깔린 3개의 관들에서 모든 부장품들을 꺼낸 한대보는 석실로 향했다. 석실에는 3개의 관곽이 더 놓여있었다. 원래 건륭제와 2명의 황후, 3명의 황귀비, 총 6개의 관들이 가지런히 안치되어 있었는데, 개중 건륭제의 관과 황비 2명의 관은 석문 앞쪽으로 떠내려왔지만 나머지 황비 3명의 관들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었던 것. 아직도 훔쳐낼 관들이 많다는 것에 신난 한대보와 병사들은 관을 에워싸고 도끼와 괭이로 내리찍었다. 병사들은 시체를 내팽겨치듯이 꺼내 모자와 옷을 벗기고 머리카락까지 뽑아버렸다. 개중 가경제의 생모인 효의순황후의 시체는 썩지 않고 나름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알몸으로 벗겨진 채 흙탕물에 던져져 군홧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시체를 능욕한 병사들은 악귀처럼 관 안에 있던 보물들에 달려들었다. 그림, 명첩, 산호로 조각한 문방구, 상아, 옥석, 금불, 은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세 발 구리솥, 한나라 시대의 옥 사리탑, 송나라 시대의 도자기병과 주전자 등이 발견됐다고. 쓸만한 보물들은 모두 상자 안에 쑤셔넣었고 별 가치가 없어보이는 것들은 그냥 물에 던져서 밟아버렸다. 훔친 보물들은 모두 무덤 밖으로 실려나갔다. 이렇게 서태후와 건륭제의 무덤이 탈탈탈 털려나가면서 쑨뎬잉의 도굴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쑨뎬잉은 떠나갔지만 도굴 소식을 전해들은 토비와 인근 주민들이 미친듯이 현장으로 몰려왔다. 주민들은 군인들이 미처 챙겨가지 못한 조그마한 옥 조각이나 보석 쪼가리를 싹싹 쓸어담았다. 당시 지하무덤 내부는 완전 철벅철벅한 진흙탕이라 수색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래서 주민들은 아예 포대자루와 바구니를 가져와 내부의 진흙까지 모조리 퍼갔다. 그리고 하천으로 가서 포대자루의 내용물을 쇠망에 쏟아부어 흐르는 물에 걸러내고 금과 보석들만 따로 챙긴 것. 이 과정에서 건륭제와 후비들의 시체도 시냇물에 쓸려갔다. 토비와 주민들은 더 나아가 동치제의 후궁 혜비의 무덤도 털었다. 혜비의 시신은 나름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능욕당하고 알몸 상태로 버려졌다.
4. 결과
도굴 소식이 전해지자 경진위수사령관 옌시산은 톈진경비사령관 푸쭤이를 파견하여 동릉을 보존하게 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후 쑨뎬잉의 부하 담온강이 체포되면서 범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 쑨뎬잉은 옌시산, 진군 총참모장 주수광, 베이핑 시장 하기공, 허베이성 정부주석 상진 등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자신이 무죄라고 로비하였다. 이에 옌시산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군대가 대규모 도굴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싫고 청나라도 그다지 좋지 않은 판에 담온강을 석방시켜 주었다.하지만 청나라 조정과 유신들이 들고 일어나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이 일은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쑨뎬잉의 탈영병인 장기후가 칭다오에서 체포되어 자초지종을 고변하면서 쑨뎬잉과 부하들은 재판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쑨뎬잉이 막대한 뇌물을 사방에 뿌린 덕에 도굴을 한 게 아니라 사실 비적들이 도굴을 하고 남은 것을 주운 것 뿐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게 되었다.
이 두 건의 도굴과 부실한 수사로 인해 청나라 황제였던 선통제는 국민당에 치를 떨면서 등을 돌리게 된다. 오죽 한이 골수에 사무쳤으면 푸이는 하얀 상복을 갈아입고 매일 3번씩 신하들과 대상(大喪)의 의례를 진행했다.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내가 더이상 애신각라의 후손이 아니다!라고 선포할 정도. 하지만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던 푸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로 국민당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쳤던 푸이는 나중에 결국 일본에 협조했고, 1931년 천진사변을 계기로 만주행을 택해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타이완은 근처도 가지 않았다.
5. 매체에서
마지막 황제에서 카와시마 요시코의 입으로 언급된다. 문수가 떠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 선통제가 일본에 붙는 계기가 된다.6. 참고 문헌
-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 웨난, 돌베개.
- 구룡배의 전설 1,2권, 웨난, 일빛.
- 황제에서 시민으로 상권, 선통제, 문학과비평.
[1] 같은 청동릉에 있던 강희제와 함풍제, 동치제의 무덤은 이 때 도굴되지 않았다. 원래 서태후, 건륭제, 강희제의 무덤 이렇게 3개를 도굴하려 계획했지만, 강희제의 무덤은 이미 침수되어버린 탓에 파려고 시도하기만 해도 구덩이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바람에 결국 실패하고 물러났다. 대신 이 무덤들은 1945년 9월 토비 출신의 황금중(黃金仲)이 깔끔하게 약탈해갔다.[2] 순치제가 천연두로 죽고 아끼던 후궁이 출가해서 무덤에 신발과 부채밖에 없다는 야사가 있다.[3] 이는 대문 뒤에 도굴방지장치인 '자래석'이라는 거대한 돌기둥 하나가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어서 그랬다. 황실은 이 자래석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고 당연히 군인들은 자래석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다.[4] 능침 바로 뒤에 있는 산자락의 숲에서 통나무를 베어왔다. 지름 20cm, 높이 5m 남짓의 큼직한 통나무였다.[5] 중국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관을 마트료시카처럼 층층이 몇 겹을 겹쳐서 안치했다. 고대 이집트의 관을 생각하면 쉽다. 전국시대부터 명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관이 6겹에 달했다. 명나라 시대부터는 겹의 수가 점차 줄어들어 보통 2겹으로 만들어졌는데, 바깥쪽을 '곽', 안쪽을 '관'이라고 부른다.[6] 전손자유와 유 부관은 진심으로 시체가 달려들수도 있을 거라 걱정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은 전손자유는 기관총 2정을 밖에 설치해 총구를 관쪽으로 맞춰놨고, 사수들한테 당장이라도 발사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7] 위의 목록에서 언급된 '옥으로 만든 배추'가 바로 이 취옥백채다. 현대에는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가장 유명한 보물들 중 하나다.[8] 우물이라 하지만 깊이는 70~80cm에 불과하다. 실제 물을 긷는 우물이 아니라 능침 전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혈자리이자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다.[9] 당시 무덤 안에 유입된 오수는 건륭제, 그 비빈들의 시체와 섞이면서 그야말로 시체썩은 물이었다. 안그래도 한치 앞이 안보이는 어두컴컴한 지하 무덤에서 이 썩은 물에 미끄러져 빠지면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10] 이때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몸에 밧줄을 묶어서 내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