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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계성왕(啓聖王) | |
성 | 자(子) | |
씨 | 공(孔) | |
휘 | 숙량흘(叔梁紇) / 추인흘(郰人紇) / 추숙흘(鄹叔紇) | |
생몰 | 기원전 622년 ~ 기원전 549년 | |
직업 | 대부(大夫) | |
가족 | 부왕: 창성왕(昌聖王) 아내: 시씨(施氏), 안징재(顔徵在) 아들: 맹피, 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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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자의 아버지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창성왕(昌聖王)으로 추봉된 공백하(孔伯夏)의 아들. 휘가 흘 자가 숙량이다. 다른 이름은 추인흘(郰人紇), 추숙흘(鄹叔紇). 시호는 계성왕(啓聖王).[1]2. 생애
숙량흘 자체의 기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용감하고 무예를 갖췄으며 완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노양공의 재위기간 때 추읍의 대부(大夫)의 관직을 얻었다.노양공 10년 진(晉)이 제후의 군사와 함께 노나라를 공격했을때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을 팔로 받쳐 아군을 달아나게 했었고 양공 17년엔 제(齊)의 군사에 포위된 장흘을 자신 외의 2명과 함께 제군을 돌파하여 장흘을 호송했다.
아내는 시씨(施氏)와 안징재(顔徵在), 첩 하나로 시씨와의 사이에 딸 아홉, 첩한테 아들 맹피를 낳았으나 맹피는 절름발이라 대를 잇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숙량흘은 안징재(顔徵在)를 부인으로 들여 야합하여 공자를 낳는다.[2][3][4]
이후 기원전 549년 사망했다.
[1] 청나라의 옹정제 추봉(1724).[2] 안징재의 나이에 대해선 명확한 기록이 없다. 16세, 18세, 심지어 일본측 자료에는 10세라는 설도 있다. 다만 숙량흘이 세 번째 부인을 구하기 위해 안씨 곧 안징재의 집에 구혼했을 당시 아버지가 세 딸 모두에게 물어본 것을 보면 세 딸 모두 결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안징재는 셋째, 막내임을 감안해보면 10대 중반이 유력하긴 하다. 여기에 더해 결혼 후 안징재가 남편이 나이가 많아 제 때 아들이 생기지 못할까 두려워 니구산에서 빌었다고 했는데 이를 보면 숙량흘의 건강이 문제지 안징재는 바로 임신 가능한 나이대였음 추측할 수 있다.[3] 야합이라는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야합의 표현도 이와 같은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단어라고 볼 수 있는데, 野는 제1의미인 들이라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릇됨, 비속함, 저속함 등의 의미도 있다.(야비하다 할 때의 야가 바로 이 野다.) 논어에서 공자가 자로와의 대화 도중 "子曰 野哉 由也"라고 질책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야의 주석이 비속함을 뜻한다 되어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야합의 의미(불륜, 정치적 뒷거래 등)과는 다른, 숙량흘과 안징재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관계이였기에 사마천은 이 둘의 결합을 야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예(禮)에 맞지 않은, 떳떳한 혼인관계는 아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생각해볼 수 있다.[4] 퇴계 이황은 극단적으로 안징재가 니구산에 빌었다던지 야합했다는 등의 이런 사건들을 모두 후대가 지어냈다고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