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02:49:20

북흉노



北匈奴

1. 개요2. 역사3. 기록4. 기타5. 역대 선우 및 지도자

1. 개요

48년 흉노의 2차 분열로 형성된 세력. 오르도스와 주변 지역을 근거지로 한 남흉노와 달리 몽골 고원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후한, 남흉노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악화된 틈을 타 선비족의 공격을 받아 몽골 고원에서의 주도권을 잃고 서쪽으로 쫓겨났다.

2. 역사

흉노 분열 초기에는 남흉노보다 강성했었으며 서역의 소국들을 두고 후한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우유선우가 선비족에게 피살당한 전후를 기점으로 남흉노로 투항하는 세력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남흉노-후한 연합군과의 싸움에서도 패배해 선우들이 실종되거나 피살당하면서 북흉노는 크게 약화되었다. 몽골 고원 지역 또한 선비족들이 차지하면서 북흉노는 서역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몽골 고원에 남아있던 흉노족은 선비족으로 편입되었다.

2세기 초를 전후로 북흉노 선우에 대한 기록은 극히 줄어들며, '북로호연왕(北虜呼衍王)'[1]이라는 인물이 123년부터 151년까지 후한과 서역을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153년 거사후부의 왕 아라다(阿羅多)가 후한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북흉노로 도주했는데, 북흉노에서 다시 거사후부로 돌아와 투항한 사건을 끝으로 후한의 서역지배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북흉노 관련 기록도 끊기게 된다.

3. 기록

지난해 삼월 중에 북흉노의 선우정(虜庭)을 박살내었을 때, 북선우(北單于)는 남흉노의 군대에 혼이 나고 또 정령(丁令)과 선비(鮮卑)를 두려워하여 도망쳐서 멀리 달아났으나, 지금은 안후하(安侯河)[2]의 서쪽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영원 3년(91)에 북선우는 다시 우교위(右校尉) 경기(耿夔)에게 격파되었는데 도망한 후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그 아우인 어제건(於除鞬)이 스스로 즉위하여 북선우(北單于)가 되었는데...(중략) 포류해(蒲類海)[3] 연안에 머무르면서 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었다.
[북]선우(北單于)는 놀라고 두려워서 기개가 꺾여서 양탄자[毛氈]를 덮어쓰고 오손(烏孫)으로 달아났다.
북방의 오랑캐 호연왕(呼衍王)은 항상 포류(蒲類)와 진해(秦海)[4] 사이를 전전하면서 서역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약탈했다.
순제(順帝) 영건(永建) 원년(126) 반용은 후왕 농기의 아들 가특노(加特奴)와 팔활(八滑) 등을 이끌고 정예병을 동원, 북방의 오랑캐인 호연왕(呼衍王)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후한서 119권 남흉노열전 79제
[북]선우가 퇴각하자 조준은 추격하여 골도후(骨都侯)를 죽였고, 이에 호연왕은 고오하(枯梧河)[불명]라는 곳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로 차사(車師)에는 더 이상 흉노의 자취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한서 118권 서역전 78제
속특국(粟特國). 총령(悤嶺)의 서쪽에 있다. 이 나라는 예전의 엄체(奄蔡)[6]이고 일명 온나사(溫那沙)라고도 한다. 대택(大澤)의 옆에 있고 강거의 서북쪽에 있으며, 대(代)와는 16,000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 흉노가 그 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했는데, 왕 홀예(忽倪)[7]에 이르기까지 이미 3세대가 지났다.
위서 102권 열전 90제 서역

4. 기타

(중략) 열반국(悅般國)은 오손의 서북쪽에 있으며 대와는 10,930리 떨어져 있다. 그 조상은 흉노 북선우의 부락민이었다. 한나라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에게 쫓겨나 북선우가 금미산(金微山)을 넘어 서쪽에 강거로 도주했을 때, 그 가운데 약해서 가지 못한 사람들이 구자의 북쪽에 남은 것이다. 그 나라는 방이 수천 리에 이르고 무리는 가히 20여 만 명이다. 양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임금]을 가리켜 ‘선우왕’(單于王)이라고 부른다. 그 풍속과 언어는 고차(高車)와 동일하며, 그 사람들은 호인[胡]보다 청결하다. 풍속은 머리카락을 눈썹에 맞추어 가지런히 자르고, 제호(醍醐)를 머리카락에 발라 반짝반짝 빛나게 하며, 하루에 세 차례 씻는데 그런 연후에 먹고 마신다. 그 나라의 남쪽 경계에는 화산(火山)이 있고, 그 산 주변의 돌들은 모두 녹아내려 땅 위로 수십리를 흐르다가 딱딱하게 굳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약으로 쓰는데 곧 석류황(石流黃)이다.(이하 생략)
위서(역사책) 서역열전 중

위서 서역열전에 등장하는 열반국은 90년 북선우(어제건의 형)가 한나라 거기장군 두헌에게 쫓겨 도주할 때, 북선우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 구자의 북쪽에 남아서 세운 국가라고 한다. 이들의 국왕은 '선우왕(單于王)'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5. 역대 선우 및 지도자

기록이 상세한 남흉노 선우들과 달리, 북흉노 선우들의 기록은 극히 적은 편으로 기록상 알려진 순서로 작성하였다.
대수 호칭 이름 재위기간 비고
초대 포노선우(蒲奴單于) 난제포노(攣鞮蒲奴) 48년 - ? 초대 선우
2대 우유선우(優留單于) 난제우유(攣鞮優留) ? - 87년 후한과 전쟁에서 사망
3대 북선우(北單于)[8] 난제□[9] 88년 - 91년(?)[10] 난제우유의 이복형
4대 어제건선우(攣鞮於除鞬) 난제어제건(攣鞮於除鞬) 91년 - 93년 북선우의 동생
비정통 봉후선우(逢侯单于) 난제봉후(攣鞮逢侯) 94년 - 118년 남흉노 망명 북흉노인들에 의해 추대
후한에 투항
5대 선우(单于) 불명 2세기 초반 135년 거사후부의 공격을 받음
- 북로호연왕(北虜呼衍王) 불명 미상 흉노 유력씨족 호연씨의 수장

[1] 북쪽 오랑캐의 호연왕이라는 뜻으로, 흉노의 유력 씨족인 호연씨(呼衍) 출신이다.[2] 오늘날 몽골의 오르콘 강[3] 지금의 일리 카자흐 자치주에 있는 바르쿨호(巴里坤湖).[4] 흑해, 지중해, 발하슈호 등 추정이 다양하다.[불명] [6] 알란족[7] 아틸라의 아들을 이른다.[8] 후한이 남흉노의 선우(남선우)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라 선우 스스로 칭한 호칭이 아니다.[9] 인명이 소실되었다.[10] 후한의 우교위(右校尉) 경기(耿夔)와 싸움에서 도망친 후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