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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푸/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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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2. 明製漢服(명나라 한푸)의 당대의 인식은?3. 종류
3.1. 황제3.2. 황후


파일:명나라 복식 모음.jpg

파일:external/i2.w.yun.hjfile.cn/song5_5022.jpg

1. 역사

명나라의 복식 양식은 크게 9대 황제 홍치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이유는 원나라 말기 유행한 고려양이 명나라 초기에도 계속해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치제 이전 명나라 복식은 여말선초 한복과 매우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고려양이 명나라 복식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영락제가 명나라 건국 당시 수도였던 송나라의 수도 난징 대신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고려양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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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을 보면 한눈에 봐도 여말선초 시기 한국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류층 여성 복식을 거의 복사한 수준으로 닮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복식이 원나라 말 베이징 일대의 여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치마 실루엣이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일관되게 여러 벌 껴입어 나타나는 '풍성한 실루엣' 치마 컨셉을 추구했던 반면 한족들은 투피스 형태의 복장도 한나라 시대의 원조 한푸처럼 몸에 착 감기는 '가늘고 긴 실루엣' 치마 컨셉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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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치제고려양금지하면서 명나라의 복식에서 고려양은 점차 없어졌지만 명나라의 복식이 완전히 송나라 시절 복식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여성복에서는 고려양이 사라졌지만 특이하게 고려양의 여성복이 남성복으로 변화하여(!) 명말까지 명나라 남성 복식에 흔적을 남겼다. 위 사진의 금의위 관복을 보면 고려양 철릭(몽골 기원)이 중국식으로 변한 모습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몽골풍의 영향을 받아 차이나 칼라 등의 형태가 나타났다.

명나라 중후기부터 입은 의상은 이질적이기까지 한 초기의 명나라 복장보다 송나라 시대의 가녀린 느낌과 비슷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때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치마(췬, 裙)와 저고리(아오)로 구성된 투피스이기는 했다. 느낌과 착장법이 이전 한족식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간혹 위와 같은 그림을 대면서 해당 복식 형태는 한족 고유의 전통복식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복식이 한푸의 짝퉁이라는 개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혈통상 한화호족 왕조였던 당나라[1]의 복식은 그렇다 쳐도 순수 한족 왕조였던 송나라의 전통 복식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원말명초에 베이징 일대에서 유행했던 고려양의 존재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도 원나라 말기로부터 명나라 초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고려양이 유행했다는 것을 모르고 이 한푸가 조선 한복의 원형이 된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위대한 중화의 전통 복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무언가가 사실은 고려 옷 짝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고려양이 전통 한푸를 제끼고 대유행한 이유[2]부터 굴욕의 역사인지라 중국인들이 잘 전달을 안 하는 탓이다. 이런 중국인을 만나면 '그게 정말 중화의 전통 복식이었다면 고려양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금지시키지도 않았겠지.'라고 말해주면 된다.

명나라 중~후기의 여성 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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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63c9114a378a4464e8c087f55c61be96f26a97ae1ae9cdee4777df59fe5683a4.jpg 파일:external/83ef36665714b71bf5607373ace48ca08ca20a370634efbd9bd4b53a87e92eeb.jpg

명나라 중후기로 가면 고려양은 사라지지만 대신 오래전부터 유입된 북방계 패션과 원나라 때 몽골풍의 영향으로 중앙으로 여미는 형태인 일명 차이나 칼라 패션으로 변모한다.

전체적인 실루엣이 1자 형태로 직선적으로 떨어지는 이 의복은 앞뒤를 남기고 양 옆으로 밑단까지 주름을 끝까지 잡은 긴 치마(마면군, 馬面裙)에 길게 내려오는 저고리(아오)를 입고 그 위에 소매와 옷깃에 자수가 들어간 겉옷(평상시에는 소매가 좁은 착수 배자)이나 조끼(배심, 비갑)를 입었다. 겉옷의 네모난 깃(방령)에 주로 장식이 들어갔다.

명나라 여성들은 조선 여성들과 다르게 평상시에도 치마와 저고리만 입기보다는 위에 다양한 겉옷을 입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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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hinesecostumes.files.wordpress.com/mingman4.jpg파일:external/chinesecostumes.files.wordpress.com/mingman3.jpg파일:external/chinesecostumes.files.wordpress.com/mingman2.jpg
선비들의 복식인 도포(道袍,dao-pao)의 모습

고려양 이외에도 원나라 이전의 송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따랐기 때문에 남성 복식에서는 그 영향도 찾아볼 수 있는데 심의단령과 기타 포(袍) 종류가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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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혼례복을 입은 모습.[3]

참고로 남성의 복장이 한국에서도 전통혼례복으로 사용되는 조선시대 관복과 비슷한 것은 단령이 중국에서 들어온 옷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령 자체도 중국 전통 복식은 아니고 당나라 때 들어온 서역 계통 호복의 일종이다. 본래 선비족 계열인 무천진 관롱집단이었음에도 이민족 왕조가 아닌 정통 한족 왕조를 자칭한 수나라당나라의 영향으로 중국화되었다.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심의, 관복인 단령은 모두 한푸가 넘어간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반면,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4]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아아, 중원의 세계에 오랑캐가 가득해 여담이지만 안토니오 꼬레아의 초상화라고 알려졌던 루벤스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도 연구 결과 1600년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명나라 상인의 한푸를 그린 것임이 밝혀졌다.

이들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한푸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고 승려도사 그리고 경극과 곤곡을 비롯한 연극 배우라는 특정 신분계층은 여전히 한푸를 입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도사들은 청나라 때에도 변발을 하지 않았다.

2. 明製漢服(명나라 한푸)의 당대의 인식은?



여러 SNS 중국인은 명나라 한푸를 근거로 자신들이
한국 한복의 원조이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다닌다
그러나 전술한 모든 근거로 볼때 명나라 한푸는 한족의 의복 역사상 지금까지 없었다가 갑자기 생긴 복식으로 고려양의 영향이 크다고 할수있으며 실재로 이 내용은
명실록 태조고황제때 그대로 서술하고있다
太祖高皇帝實錄 卷三十 洪武元年 二月 十一日 詔復衣冠如唐制初元世祖起自朔漠以有天下悉以胡俗變易中國之制士庶咸辮髮椎髻深䄡胡俗衣服 胡俗衣服:舊校改俗作帽。 則為袴褶窄袖及辮線腰褶婦女衣窄袖短衣下服裙裳無復中國衣冠之舊甚者易其姓氏為胡名習胡語俗化既久恬不知怪 上久厭之至是悉命𣸪衣冠如唐制士民皆束髮于頂官則烏紗帽圓領袍束帶黑靴士庶則服四帶巾 士庶則服四帶巾:明史輿服志同。廣本四作回。健按:實錄卷四十九第二頁後十一行作四帶巾。 雜色盤領衣不得用黃玄 衣不得用黃玄:廣本玄下有色字。 樂工冠青卍字頂巾 青卍字頂巾:廣本無卍字;抱本作萬。 繫紅綠帛帶士庶妻首飾許用銀鍍金耳環用金珠釧鐲用銀服淺色團衫用紵絲綾羅紬絹其樂妓則戴明角冠皂褙子不許與庶民妻同不得服兩截胡衣其辮髮椎髻胡服胡語胡姓一切禁止斟酌損益皆斷自 聖心于是百有餘年胡俗悉復中國之舊矣
태조고황제실록 권30 홍무원년 2월11일 황제는 조서를 내려 의복과 관제를 당나라(唐)의 제도로 회복하도록 명령하였다. 원나라(元)의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는 북방 초원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후, 전반적으로 오랑캐(胡族)의 풍습으로 중국의 제도를 변경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변발(辮髮)과 위로 묶은 머리(椎髻)를 하고, 두터운 옷(深䄡)을 입으며, 오랑캐(胡族)의 복장을 착용하였다. 남성들은 좁은 소매(窄袖)의 바지(袴褶)를 입고, 허리에 끈을 단 옷을 착용하였다. 여성들은 좁은 소매의 짧은 저고리(短衣)와 치마(裙裳)를 입어 더 이상 중국 전통 복장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성씨를 버리고 오랑캐의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그들의 언어를 익혀 오랑캐의 풍속에 동화된 지 오래되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황제는 오랫동안 이를 싫어했으며, 마침내 이번에 당(唐)나라의 복장 제도로 완전히 되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모든 백성들은 머리를 정수리에 묶고, 관리(官)는 **오사모(烏紗帽, 검은 천으로 만든 모자)**와 **원령포(圓領袍, 둥근 깃이 있는 예복)**를 착용하며, 허리띠(束帶)와 검은 신(黑靴)을 신었다.
일반 선비와 백성들은 **사대건(四帶巾, 네 개의 끈이 달린 모자)**을 쓰고, 다양한 색깔의 둥근 깃이 있는 옷(盤領衣)을 입되, 황색과 검은색(黃玄)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樂工)은 **청색卍(만)자 무늬가 새겨진 모자(頂巾)**를 쓰고, **붉고 푸른 천으로 만든 허리띠(帛帶)**를 착용하였다.
일반 백성의 부인들은 금으로 도금한 은제(銀鍍金) 귀걸이를 사용할 수 있었고, 팔찌(釧鐲)는 은으로 만들도록 허용되었다.
연한 색상의 **단선(團衫, 둥근 깃의 전통 중국 의복)**을 착용하며, 이를 저사(紵絲, 삼베 실)·능(綾)·라(羅)·주(紬)·견(絹) 등의 옷감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악기 연주자와 기생(樂妓)은 **명각관(明角冠, 전통적인 뿔 모양의 관모)**을 쓰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덧옷(皂褙子)을 착용해야 했으며, 일반 백성의 부인과 같은 복장은 금지되었다. 또한, 오랑캐(胡)의 상하로 나뉜 두 조각 옷(兩截胡衣)은 입을 수 없었다.
변발(辮髮), 묶은 머리(椎髻), 오랑캐 복장(胡服), 오랑캐 언어(胡語), 오랑캐 성씨(胡姓) 등을 전부 금지하였다.
모든 조치는 황제(聖心)의 뜻에 따라 신중하게 조정하여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오랑캐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중국 전통이 회복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여성들은 좁은 소매의 짧은 저고리(短衣)와 치마(裙裳)를 입어 더 이상 중국 전통 복장을 볼 수 없었다.||
2.不許與庶民妻同不得服兩截胡衣

서민과 처자들이 오랑캐(호복)의 위아래 상하로 나뉜 두조각옷을 입는것을 금지하였다

파일:images-68.jpg

즉 sns중국인이 올리는 고려양한푸는 이미 그당시 당대에도 한푸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었던것이다

3. 종류

3.1. 황제

파일:명나라 황제복식1.jpg

명나라의 황제의 곤룡포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황금색만 있지는 않았는데 여러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며, 황제마다 그 문양이 조금씩 달랐다.

곤룡포 이외에도 면복, 피변복 등 조선의 국왕보다 좀 더 다채로운 옷을 입었다.

3.2. 황후

파일:명나라 황후복식.jpg

명나라의 황후는 송나라의 황후 복식을 베이스로 두고 변화했다.

치마는 대체로 마면군을 입었으며 예복은 황금색 적의이다. 보통 봉관을 썼으며 진주를 얼굴에 붙여 화장을 했다. 적의 위에는 하피라는 끈을 어깨에 올려 꾸몄다.


[1] 엄밀히 따지면 튀르크, 퉁구스 계열 선비족이다.[2] 그야 물론 한족이 몽골인에게 종속되어서...[3] 참고로 이 사진 속 신부가 쓴 봉관(鳳冠)은 청나라 때 양식으로, 정확히는 경극과 같은 연극에서 쓰는 의상과 소품을 그대로 썼다.[4] 청나라의 다수 민족이 한족인 관계로 이들 중 대부분이 한족이었다! 저 오랑캐들이 한족이라니! 청나라는 유목민 정부였고. 한족들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목민 풍속이었던 변발과 치파오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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