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4:18:20

라슈트라쿠타 왕조

인도 ·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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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슈트라쿠타
ರಾಷ್ಟ್ರಕೂಟ

Rāṣṭrakūṭa
파일:Indian_Rashtrakuta_Empire_map.svg.png
존속기간 753년 ~ 972년
수도 굴바르가 ㅡ>만야케타
국가원수 마하라자
주요 군주 단티두르가(735~756)
고빈다 3세(793~814)
아모가바르샤 1세(815~877)
언어 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종교 힌두교 (비슈누파, 시바파)
자이나교
불교
종족 칸나다인
성립 이전 찰루키아 왕조
멸망 이후 서찰루키아 왕조

1. 개요2. 역사
2.1. 건국과 팽창2.2. 전성기2.3. 쇠퇴와 멸망
3. 여담

[clearfix]

1. 개요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역사[1]

6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데칸 고원과 남인도 일대를 지배했던 왕조.[2]

753년에 찰루키아 왕조를 멸망시켜 중남부 인도의 최강자가 되었으며, 데칸 일대에서 발흥한 왕조였음에도 북인도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8~9세기 즈음에는 프라티하라 왕조, 팔라 왕조카나우지를 놓고 잠시 승리하기도 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다.[3] 그러나 이후 무능한 군주들의 통치와 봉신국들의 독립으로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에는 972년 서찰루키아 왕조에게 멸망한다.

2. 역사

2.1. 건국과 팽창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동판 비문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만가드 동판 교부금 비문(753년)에 따르면, 아찰라푸라[4]의 제후왕이었던 단티두르가는 753년 '바다미의 키르티바르만 2세의 위대한 카르나타카군을 격파하고 찰루키아 제국의 북부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장인인 팔라바 왕조의 난디바르만과 연합하여 말와, 칼링가, 코살라, 스리사일람의 통치자들을 잇달아 물리쳤다.

단티두르가의 후계자인 크리슈나 1세 대에 이르면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찰루키아를 완전히 멸하고 데칸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780년에 크리슈나 1세로부터 통치권을 이어받은 드루바 다르바르샤의 치세에는 남인도의 카베리강에서부터 중부 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이후 그는 북인도 세력의 중심지인 카나우지로 쳐들어가 프라티하라 왕조팔라 왕조를 무찔렀지만, 더이상의 영토를 확보하지는 못했다.[5] 다만 그의 치세 동안 라슈트라쿠타가 중부 인도를 넘어 범인도 세력으로 거듭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2. 전성기

드루바 다라바르샤의 셋째 아들인 고빈다 3세의 제위 계승은 전례 없는 성공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의 치세 동안 라슈트라쿠타는 데칸을 넘어 북인도의 갠지스 평원을 넘보았으며 프라티하라 왕조 그리고 팔라 왕조카나우지를 놓고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다.[6] 카나우지를 정복한 뒤에, 고빈다 3세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구자라트, 코살라, 마이소르를 정벌하고 남인도 팔라바, 촐라, 판디아, 체라 등을 복속시켰으며 벵기와 실론[7]까지 나아갔다.

814년에 즉위한 고빈다 3세의 후계자 아모가바르샤 1세의 치세는 라슈트라쿠타 패권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그는 즉위한 직후에 곧바로 제국의 수도를 굴바르가에서 만야케타로 이전하였으며,[8] 자신에 반대하여 일어난 봉신들과 신하들의 반란을 모조리 진압하여 왕권을 공고히 했으며 철권통치를 행했다. 그는 이전 고빈다 3세만큼 호전적인 영토 팽창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고, 대신에 아모가바르샤는 이웃한 강가, 동찰루키아, 팔라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제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의 치세는 '예술, 문학, 종교를 풍요롭게 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그는 과거 마우리아 왕조아소카 황제와 비교되어 '남방의 아소카'라고도 불렸다.

아모가바르샤 1세 이후 즉위한 크리슈나 2세의 시기에 라슈트라쿠타는 동찰루키아의 반란 때문에 잠시동안 혼란에 빠졌고 데칸 동부와 남인도 일부 지역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인드라 3세 대에 다시 중흥을 이루어, 북인도의 적대 세력들을 무찌르고 인도 중부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였으며 갠지스 강야무나 강 사이 지역을 침공하여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914년에 팔라 왕조가 재독립 하는 등 프라티하라 왕조가 빈틈을 보이자,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915~916년 사이에 다시 북진하여 카나우지 지역 (힌두스탄 서부)을 점령하고 히말라야 까지 이르러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9] 그는 또한 벵기에 대한 영향력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오랜 적수였던 프라티하라와 팔라를 계속해서 물리쳤다. 이후 연약한 황제들이 잇달아 즉위하여 라슈트라쿠타는 부흥과 쇠퇴를 반복하였다. 마지막 위대한 황제였던 크리슈나 3세는 제국을 통합하여 나르마다강에서 카베리강에 이르는 이전 전성기 수준의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실론 왕을 굴복시켜 공물을 바치도록 만드는 등 제국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

2.3. 쇠퇴와 멸망

크리슈나 3세 사후에 완전한 쇠락의 길에 접어들던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949년, 남인도에서 힘을 기르던 촐라 왕조에게까지 패하며 무력함을 드러냈고, 이를 기점으로 여러 봉신들과 제후왕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 세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결국 972년, 파라마라 왕조의 공격을 받아 수도 만야케타가 약탈당하면서 라슈트라쿠타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마지막 황제인 인드라 4세는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단식을 행했다고 하며 그 이후의 기록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1년 뒤인 973년경에는 이미 라슈트라쿠타 세력이 데칸에서 일소되고 동부 데칸에 잔존해 있던 찰루키아의 잔당들이 되돌아 서찰루키아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한편 라슈트라쿠타가 북진을 준비하던 준비하던 914년에 독립해나간 후칼라추리 왕조와 북쪽의 솔란키 왕조도 왕조 교체시기인 973년에 중북부 영토의 일부를 가져간다.

라슈트라쿠타 씨족은 이후에도 구자라트, 카르타나카, 카나우지, 라자스탄, 자발푸르, 조드푸르, 마하라슈트라 일대에서 통치를 계속해 나갔으나 이들 대부분은 12세기를 전후로 하여 모조리 몰락했다. 11세기 초에 촐라 제국의 라자디라자 1세가 실론 섬을 정복할때 그에게 항복한 자프나 왕국의 마다바라자가 라슈트라쿠타 왕조 출신이라고 하는 사료도 있다.

3. 여담

아모가바르샤 왕의 통치 시기에 인도를 방문한 아랍 연대기 작가 술레이만은 당시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아바스 칼리프국, 당 제국, 동로마 제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4대 제국 가운데 하나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1] Anwoo Mapping History의 영상.[2] '라슈트라쿠타'라는 이름은 본래 인도의 씨족 명칭이다. 이들은 5~6세기 즈음부터 인도 사료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북인도 일대에서 조그만한 군소 왕조를 통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있고 나중에 가서야 데칸 고원으로 이주했다고 나온다. 본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이들 씨족들이 세운 왕조들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중세 데칸고원의 왕조를 의미한다.[3] 당시 북인도 세력들에 대한 남인도의 방파제가 되어주어 남인도 왕조들이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의의가 있다.[4] 오늘날 마하라슈트라주 엘리치푸르[5] 이는 과거 사타바하나 왕조 이상으로 북진에 성공한 것이며 데칸계 왕조 중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6] 한 사료에서는 고빈다 3세의 말이 히말라야 개울의 얼음물을 마셨고, 그의 전쟁 코끼리는 갠지스의 성수를 맛보았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북진하여 갠지스 강히말라야까지 진출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10] 같은 사료에선 그의 업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마하바라타아르주나와 비교하고 있고, 다른 사료에서는 '데칸의 북소리가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말라바르의 해안까지 들렸다'고 하였다.[7] 오늘날의 스리랑카.[8] 이후 만야케타는 982년 멸망 직전까지 계속해서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였다.[9] 그러나 프라티하라 왕조의 반격으로 혼란스럽던 와중에 인도 중북부가 919년, 파라마라로 독립하여 북부 카나우지와의 보급로를 상실했고 고립된 카나우지의 라슈트라쿠타 군대는 끔살 당하여 921년에는 오히려 북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프라티하라 왕조도 상처 뿐인 회복이었고 956년, 라자스탄이 차우한 왕조로 독립한 후 북인도의 패권을 상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