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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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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강과 힌두쿠시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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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성채

1. 개요2. 지리3. 역사
3.1. 카투르 왕조
3.1.1. 영국의 간섭3.1.2. 근현대
4. 치트랄 성채5. 교통6.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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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협곡의 농경지
우르두어 چترال
코와르어 ݯھیترار
영어 Chitral

파키스탄 북서부의 도시. 인더스강의 지류 중 하나인 치트랄 강변의 협곡에 위치하며, 힌두쿠시 산맥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한다. 1969년까지 치트랄 번왕국이 있었고, 지금도 코와르 (치트랄)어가 통용되는 등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있다.

인구는 약 5만명이고, 공항도 있다. 아리아인의 원형을 잘 보존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남쪽의 칼라쉬 마을을 가려는 관광객들이 주로 경유한다. 물론, 치트랄 역시도 티리치 미르 설산과 옥빛 강물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과 옛 유적을 자랑하는 관광지이다. 해발 1500m 의 고지대에 입지했지만, 분지 지형이라 여름에는 35도를 넘길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영하 10도까지 떨어진다.

2.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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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일대의 항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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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시가지

시가지는 힌두쿠시 산맥의 최고봉인 티리치 미르의 기숡에 형성되어 있다. 아프간으로 이어지는 치트랄 (카누르) 강은 잘랄라바드에서 카불 강과 합류, 동진하여 안더스로 흘러든다. 치트랄 강 유역 내의 칼라쉬 협곡에는 눈표범, 히말라야 흑곰 등의 희귀종이 서식한다.

3. 역사

기원전 1000년경 베다 시기부터 마을이 있었고, 싱구르 고분군에서 당시 유물이 발굴되었다. 쿠샨 왕조기에는 간다라 문명권의 일부로써 불교가 융성했다. 1320년 경에는 힌두 라이스 왕조가 통치했고, 15세기 들어 길기트훈자에 기반한 무슬림 트라칸 왕조의 방계인 라이시야 왕조가 통치했다. 그러던 1520년경, 일대에는 티무르 제국 군주 후세인 바이카라의 후손이러 하는 미루자 아윱 바바가 정착했다. 그리고 1571년, 그의 손자 무흐타람 샤 카투르 1세가 치트랄의 군주가 되며 4세기간 이어질 카투르 왕조가 시작되었다.

3.1. 카투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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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왕국기

1571년 혹은 1595년에 집권한 모흐타람 샤 카투르 1세가 1630년에 사망하자, 기존 라이시야 왕가 출신의 샤 마흐무드가 카슈가르야르칸드에 기반한 모굴리스탄 칸국의 병력과 함께 돌아와 집권했다. 다만 1660년, 모흐타람 샤의 아들 상긴 알리가 샤 마흐무드를 축출하고 카투르 왕조를 복구했다. 18세기 중반에는 모굴리스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립했다. 1857년에 집권한 아만 울 물크는 길기트를 포위하는 등 카슈미르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1877년에는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에 복속하여 휴전하였다. 다만 치트랄은 사실상 독립을 유지하여 디르, 코히스탄, 카피리스탄 (현 누리스탄)의 부족들이 치트랄에 조공했고 아만 울 물크는 페샤와르의 유수프자이 파슈툰 부족과 카슈미르의 도그라 측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또한 근대화에 나서 의회를 만들고, 재판을 직접 주관했다.

3.1.1. 영국의 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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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엽의 치트랄 성채

다만 1892년 아만 울 물크가 사망하자 그 아들들 간의 계승 분쟁으 내전으로 이어졌고, 어린 축에 속하는 아프잘 울 물크[1]가 집권했으나 2달 만에 카불로 망명했던 숙부 셰르 아프잘 칸이 찬탈했다. 한달 후, 길기트로 피신했던 장남 니잠 울 물크가 돌아오자 아프잘 칸은 1천 2백의 토벌군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전향해버리자 바다흐샨으로 도주했고, 마침내 12월 니잠 울 물크가 즉위했다. 그 무렵,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듀런드 라인이 그려지며 치트랄 역시 영국 영향력 하에 놓였고 카푸르 왕조의 아프간측 영토는 아프가니스탄 왕국에 넘어갔다.[2] 이러한 중요한 시점인 1893년, 니잠 울 물크는 사냥 도중 동생 아미르 울 물크에게 암살당했다.

동시에 북쪽 바주르의 파슈툰 부족장 우므라 칸이 3천 병력과 남하했고, 길기트의 영국군 4백이 치트랄로 급파되어 회군하지 않으면 폐샤와르의 본대가 침공할 것이라 경고했다. 아미르 울 물크가 우므라 칸과 협상하려 하자, 영국군 지휘관 로보슨은 그를 폐위하고 12세의 동생 슈자 울 물크를 메흐타르 (군주)로 옹립했다. 그러자 아프간 망명 중이던 아프잘 칸이 우므라 칸에게 영토 할양을 대가로 복위시켜 달라며 합류했고, 로버슨은 구원 요청을 보낸 후 성채에서 농성했다. 성채에는 343인의 전투원을 포함한 543인이 있었고, 영국군 중 상당수는 시크-카슈미리 부대였다. 영국군은 탄약 80회 분량이 있는 7문의 산악포가 있었고, 각 병사에게는 탄창 3백개가 주어졌다. 식량은 한달 분량이 있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적대적이었다.

1895년 3월,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1백여의 정찰대가 파견되었으나 23인이 전사하고 33인이 부상당했다. 비슷한 시기, 길기트에서 파견된 1천 4백의 지원군은 4월 중순 무렵 우므라 칸에 호응한 치트랄 인들에게 패하여 파슈툰 측에 화기와 탄약을 빼앗겼다.[3] 한편 4월 초엽 무렵 현지인들이 성채의 동남쪽 성탑에 방화했고, 5시간동안 탔으나 붕괴하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땅굴을 팠고, 그동안 시작 지점의 집에서 시끄럽게 잔치를 하며 소음을 숨겼다. 따라서 소음이 탐지되었을 때에는 이미 대응 땅굴을 파기에 늦었고, 1백의 결사대가 성문을 나서 땅굴의 입구를 찾아 파던 이들과 백병전을 벌인 후 갱도를 폭파시켰다. 결사대는 8인의 희생자를 냈다. 얼마후, 밤중에 포위군이 도주했다는 외침이 있었고 다음날 아침 사실로 밝혀졌다.

한편, 4월 초엽 페샤와르에서 출정한 로버트 로우 경의 1만 5천 구원 병력[4]은 1만 2천의 파슈툰 족이 지키던 말라칸드 고개를 넘어 치트랄로 향했다. 우므라 칸은 문다의 궁전을 지키려 했지만, 병력 차이를 절감하고 후퇴했다.[5] 대군의 접근은 현지인들의 공포를 일으켰고, 후퇴했던 길기트 부대는 4월 20일에 성채로 합류할 수 있었다. 48일 동안 4백의 수비대는 41인을 잃었고, 생존자들은 6개월치 봉급 및 3개월 휴가가 주어졌다. 얼마후 로우 경 역시 당도했고[6], 우므라 칸은 보물을 실은 노새 11마리와 아프간으로 망명했다. 아즈풀 칸은 사로잡혀 인도로 유배되었고, 치트랄과 말라칸드에는 각각 2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다만 치트랄 ~ 페샤와르 간 도로 건설은 경비 문제와 러시아가 침공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로 취소되었다.[7]

3.1.2.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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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슈자 울 물크가 세운 치트랄 성채의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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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슈자 울 물크가 세운 샤히 모스크

슈자 울 물크는 무려 41년간 집권했다. 비록 잠무 카슈미루에게 야신, 기즈르 등을 상실해 영토는 줄었지만 1911년 그에 대한 복속에서 벗어나 별개의 번왕국으로 승격하였다. 평화 기간 동안 슈자 울 물크는 인도 각지는 물론, 메카 순례에 나서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만났다. 그는 왕실 및 귀족 자제들을 해외 유학에 보냈고, 1919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시에 영국군을 도왔다. 1936년 슈자 울 물크가 사망하자 아들 나시르 울 물크가 계승했으나, 1943년 자녀 없이 사망하여 동생 무자파르 울 물크가 계승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당시 치트랄 번국은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독립을 택했는데, 모하마드 진나와 친했던 메흐타르 무자파르 울 물크는 결국 파키스탄 연방에 가입했다. 동시에 카슈미르 전쟁이 발발하자 무자파르 울 물크는 지하드를 선포했고, 치트랄 왕자 마타 울 물크가 이끄는 치트랄 근위대는 길기트 부대를 도와 스카르두를 수복했다. 이후 카르길 및 라다크 전역에도 투입되었으나 그곳에선 패하였다. 1948년, 무자파르 울 물크가 요절하자 어린 아들 사이프 울 라흐만이 계승했다.

즉위 직후 사이프 울 라흐만은 파키스탄 정부와 갈등을 빚어 6년간 추방되었고, 그동안 치트랄은 현지 및 펀잡 관료들이 통치했다. 1954년, 사면을 받아 치트랄로 돌아가던 그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4세 아들 사이프 울 물크가 계승했다. 12년간 이어진 섭정기에 파키스탄 관료들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고, 1966년 친정에 나선 그는 1969년 야흐야 칸 정부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자 외교관이 되어 세계 각지를 전전했다. 치트랄은 1972년 완전히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 그후 기존 카투르 가문에게는 왕궁이던 치르랄 성채가 주어졌고, 2011년 사이프 울 물크가 사망하지 아들 파테흐 울 물크 알리 나시르가 이어받아 소유 중이다.

4. 치트랄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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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랄 강을 끼고 세워진 성채로, 1774년 모흐타람 샤 카투르 2세가 건설했다. 1895년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파괴되었다가, 1911년 슈자 울 물크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진훍, 돌, 목재를 섞어 만든 성벽은 높이 7.5m, 너비 2.5m에 달한다. 현재는 슈자 울 물크의 증손자 파테흐 울 물크 알리 나시르가 거주한다.

5.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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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트랄 공항
폐샤와르 및 이슬라마바드와 비행편이 있다. 치트랄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 중 하나로 꼽힌다.

치트랄로 가는 길은 매우 험준하고 위험한 것으로 악명 높은데, 현지인들 다수는 부시택시나, 지프, 트럭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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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르 왕조의 당주이자 마지막 치트랄 메흐타르의 아들인 파테흐 울 물크. 만약 즉위한다면 25대 군주이다.


[1] 그는 여러 형들을 죽였는데, 큰형 니잠 울 물크는 다른 곳에 있어 화를 피했다[2] 영국은 1877년 길기트, 1891년 훈자를 접수했다[3] 한겨울에 기습 예상 못할거라 여겨 방심했다[4] 우므라 칸이 포기할거라 여겨 천천히 준비했다고..[5] 해당 궁전에서 영국군은 한 스코틀랜드 회사가 3700 루피에 맥심 기관총, 34루피에 리볼버 권총을 팔겠다는 서신을 입수했다. 이후 해당 회사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6] 모험가이자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침공을 이끈 프랜시스 영허스번드는 며칠 앞서 군대를 맘대로 이탈해 성채 수비대와 성내의 마지막 남은 브랜디를 나눠 마셨다고 한다[7] 실제로 랄프 컵볼드 대령은 파미르로 사냥 여행을 갔다가 만약 영국군이 물러난다면 러시아 군이 치트랄을 장악할 계획이란 말을 들었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