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07:42:38

무함마드 알리 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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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ag_of_the_Governor-General_of_Pakistan_(1952–1956).svg
파키스탄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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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직위: 파키스탄 자치령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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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파키스탄 총독
무함마드 알리 진나
محمد علی جناح | Muhammad Ali Jinnah
파일:external/sai.columbia.edu/Quaid-E-Azam_Muhammad_Ali_Jinnah_Founder_of_Pakistan.jpg
<colbgcolor=#00247D><colcolor=#F7E017> 본명 마호메드 알리 진나바이
(મહમદ અલી ઝીણાભાઇ / Mahomedali Jinnahbhai)
출생 1876년 12월 25일
인도 제국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사망 1948년 9월 11일 (향년 71세)
파키스탄 자치령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직업 법조인, 정치인
학력 링컨스 인(Lincoln's Inn)[1]
(변호사 자격 취득) (1895년)
소속 정당 (1906년 – 1920년)
[2] (AIML) (1913년 – 1947년)
서명 파일:무함마드 알리 진나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사후
3. 기타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이자 이슬람교도의 지도자였으며,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는 부유한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 민족주의자가 되어 영국으로 유학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무료 변론을 했다.

인도 국민회의의 힌두 편향에 반발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별개의 나라를 세우자는 2국가 이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따로 독립한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현재도 평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독립을 안 했다면 내부 갈등이나 내전으로 인해 평화가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는 이슬람 분리독립운동을 추진했는데, 영국 정부와 총독부를 상대로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 및 독립을 설득했다. 결국 1947년파키스탄, 발루치스탄동벵골 지역에 따로 파키스탄 자치령이 설치되었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약속받게 되었다.

파키스탄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1956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8년에 죽었다. 다만 파키스탄이 1947년에 별도의 자치령 지정을 받아 실질적인 독립은 이룬 상태였다.[3]

2. 생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jinnah6.jpg
청년 변호사 시절의 진나

처음에는 인도민족주의이슬람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인도 국민회의 활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진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한편 자와할랄 네루 역시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진나는 힌두교 중심적인 인도 국민회의에 반발하여 결국 1930년대부터 영국 총독부와 별도로 교섭해,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고 있었던 인도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힌두계 인도와는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시켜줄 것 또는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총독부를 설치하고 자치권을 준 뒤 독립시켜달라고 호소했다.

1920년대에 진나는 인도 국민회의를 탈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슬람교 - 힌두교 사이의 타협이 가능하리라 믿고,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0년 동안의 화합 노력이 힌두 중심적인 인도국민회의에 의해 끝내 좌절된 것이다. 1930년대에 가면 진나는 별도의 이슬람 민족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자료 이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진나의 설득은 받아들여져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지역과 동벵골(현 방글라데시) 지역 등 이슬람 인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별도의 파키스탄 자치령을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했다.

진나는 이슬람 지역 총독부 설치 및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영국의 인도 총독들도 설득했다.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과 아프간-인도의 국경지대, 동벵골을 포괄한 지역에 새로 파키스탄 자치령을 새로 세웠다. 그리고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포함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총리와 의회 설치까지 허용했다. 영국의 자치령은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따라 내정에 대한 권한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 자치령의 총리[4]는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진나를 추천했고, 그는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로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별도의 자치령 설치와 동시에 인도와는 다른 나라로 독립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 등은 크게 반발했다.

진나는 인도 각지 및 인도차이나 주변 지역, 히말라야 등에 흩어져 있었던 무슬림들을 끌어모아 정착을 지원했고,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오랫동안 결핵폐렴을 앓아왔던 그는 총독으로 재직 중이었던 1948년 9월 11일 카라치에서 71세로 사망했다.

2.1. 사후

파일:파키스탄 진나.jpg
카라치에 위치한 모하마드 진나의 영묘(마자르 에 카이드)

진나는 이슬람 인도인들의 국가 건설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영국령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를 영국 정부에 청원하여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도록 했는데 이는 파키스탄이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진나는 생전에 파키스탄의 완전한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그를 국부 혹은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한다. 진나의 생일은 파키스탄의 공휴일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날짜가 공교롭게도 12월 25일, 즉 크리스마스와 같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이라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기념하지 않는 파키스탄인들도 정작 12월 25일 당일에는 쉬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3. 기타

카라치에 있는 파키스탄 최대 국제공항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서 진나 국제공항이라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 루피의 앞면 도안은 시리즈 및 권종에 관계없이 전부 진나의 얼굴이다.

진나는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한 비교적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여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 등 소수 종교에도 관용을 베풀고 배려해주었다. 그래서 파키스탄이 독립된 이후 1970년대까지 어느 정도 세속적인 나라였던 것은 진나의 관용 정책의 힘이 컸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아불 알라 마우두디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점점 판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이 사람은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는 미명하에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지지한 어용 신학자였다. 이슬람주의는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이슬람 신정 정권을 수립하려는 현대 정치사상이었다.[5]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원래 진나보다 훨씬 더 개혁적이고 힌두교에 유화적인 사람이었으나, 생애 말년에 이슬람주의로 전향하여 파키스탄 자치령 시절 아흐마디야를 전멸시킬 것을 주장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가 진나 정권 치하에서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났다.

진나가 추구했던 이슬람 모더니즘이 서서히 쇠퇴하다가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군부의 쿠데타로 무너지게 되면서 오늘날 파키스탄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심각한 종교 차별 및 성차별 국가이자 여성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이때문에 아흐마디야 신도들이 파키스탄의 수니파 근본주의 정책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과거 동벵골이었던 방글라데시에서는 우르두어 강요로 인해 진나의 평가가 안 좋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내에서 진나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소수의 무하지르계·펀자브계 무슬림들이다.

진나의 아버지는 원래 구자라트에 기반한 힌두교 신자였는데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힌두교 신앙을 계속 유지했다면 인도 아대륙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4. 매체에서

파일:진나(간디).png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영화<간디>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다. 인도의 배우인 알리크 파담시(1928~2018)가 분했으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 고집스러운 인물로 표현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 영화를 본 파키스탄인들이 분노를 상당히 표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인도에서 개봉했을 때는 진나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악역은 아니었으며, 단지 생각의 차이에 의한 노선 차이일 뿐으로, 일단 결정된 비폭력 투쟁에는 확실히 따르는 동지였다. 인도의 독립이 확정된 후에 간디와 확실하게 결별하게 되는데, 간디에게 무슬림들은 힌두교 신자를 영국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 갈라서자고 요구한다. 이에 간디가 타협책으로, 인도의 첫 번째 내각을 모두 무슬림으로 구성해주겠다고 호소하자 마음이 흔들리지만, 자와할랄 네루가 힌두교도들은 무슬림 내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간디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지적하자, 진나는 마음을 굳혀 분리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내전 중에 선택하라고 간디에게 통보한다. 이후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퇴장했다. 즉 악당이 아닌 반동인물에 가깝다.


1998년에 제작된 파키스탄 영화인<진나>에서는 이름처럼 주인공으로 나온다. 배우는 놀랍게도 크리스토퍼 리였다. 재미있는 점은, 상술한 <간디>에서 마하트마 간디 역을 맡은 벤 킹슬리인도계 영국인인데 비해, <진나>에서 모하마드 진나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잉글랜드계-이탈리아계 혼혈 영국인으로,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근데도 둘 다 실제 인물들과 싱크로율이 너무 높아서, 간디와 진나를 실제로 만나봤던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진나>가 개봉할 당시 파키스탄에서는 간디가 영화로 나왔을 때의 인도처럼 엄청난 호응을 보냈는데 그래서인지, 로튼 토마토의 평점이 84%였다. 영국과의 합작으로 음악이나 여러 쪽은 영국인이 맡았으며, 감독과 제작자, 제작사는 파키스탄 쪽이었다.


[1] 런던에 소재한 4대 법학원 중 하나.
위키피디아 참고
[2] 인도 연합 무슬림연맹(IUML)의 전신[3] 자치령에서 영국 국왕이나 파키스탄 총독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현지의 직선제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은 물론 군사, 외교 부문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수행했다.[4] 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5] 이란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