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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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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기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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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기트 서쪽 바신의 카르가 불상. (서기 700년경)

1. 개요2. 역사
2.1. 트라칸 왕국2.2. 19세기의 혼란2.3. 근현대
2.3.1. 카슈미르 전쟁과 길기트 공화국
3. 볼거리

1. 개요

우르두어 گلگت
쉬나어 گلیت
영어 Gilgit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의 주도. 스카르두에서 서북쪽으로 100km, 카리마바드 (훈자)에서 서남쪽으로 5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도심부만 따지만 약 9천, 협곡부 전체를 따지면 약 8만명명이다.[1] 현지인들은 '길트'라 부른다. 카슈미르 서부 샨두르 산에서 발원한 길기트 강에 카슈미르 북부에서 발원한 훈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도시로, 길기트 강은 다시 30km 이상을 흘러 인더스 강에 합류한다. 과거부터 펀잡카슈미르티베트를 잇는 요충지였고, 고선지 장군이 원정한 소발율국이 이곳으로 비정된다. 현대에는 카라코람 고속도로의 주요 기점 중 하나이자 파키스탄측 군사 기지이다. 훈자, 스카르두와 함께 파키스탄의 주요 관광지이자 휴양지로 명성이 높다. 시가지 동쪽에 길기트 공항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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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00년경 조성된 금동불좌상 서기 700년경 조성된 마애불

길기트는 고대 인도 불교가 육로를 통해 투르키스탄 및 중국으로 퍼져나간 통로였고, 동시에 법현이나 현장법사 등 동양의 구법승들이 천축으로 향하기 위해 거쳤던 교통의 요지였다. 7세기 당나라는 일대에 소발률 (小勃律) 국이 있었다 기록하였는데, 고대 카슈미르 왕국인 포탈라 샤히로 비정된다. 포탈라 샤히는 독실한 불교 국가였고, 5-6세기에 쓰여지고 1931년에 발견된 '길기트 문서'는 고중세 불교 연구의 핵심 사료 중 하나로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2] 7세기 중반 서돌궐의 멸망 후 일대는 당나라에 복속하였고, 7세기 후반에는 토번 제국에 복속하였다. 그러다 747년 고선지의 서역 원정을 통해 재차 당나리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750년대 탈라스 전투안사의 난으로 당의 서역 지배가 와해되자 재차 토번에 복속하였다. 토번은 일대를 브루자라 불렀는데, 현재 훈자의 주 민족인 부루쇼인과 연관이 있다고 추정된다.

2.1. 트라칸 왕국

9세기 들어 토번 역시 붕괴된 후에는 힌두교를 믿는 샤레이스 왕조가 나가르 (혹은 나가르카스)를 중심으로 일대를 통치하였다. 그들의 왕호는 라자와 유사한 '라'였다. 11세기 들어 길기트에는 이슬람이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1300년 무렵 샤나메에 나오는 이란의 전설적인 왕 아주르 잠셰드의 후예라 칭하던 튀르크계 무슬림 모험가 마이루 칸이 당시 군주 트라칸 라의 딸과 결혼한 후 그를 계승하였다. 다만 현지 전설에 따르면 아주르 삼셰드가 아이를 바치라 요구하던 식인왕 슈리 바다트 (아담 코르)의 딸과 결혼한 후, 그를 죽였다고 한다. 이는 이란-쿠르드 인들의 노루즈 설화와 유사하며, 현재까지도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진다.[3] 마이루 칸은 두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태어난 직후부터 서로 다투었다 한다.

후계자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마이루 칸은 쌍둥이인 모글로트와 기르키스에게 각각 훈자 강을 경계로 그 남쪽과 북쪽의 땅을 주었고, 이로써 훈자와 나가르 국이 비롯되었다 한다. 실제로 훈자와 나가르 군주들은 트라칸 왕가의 후예를 자처하였다. 한편 길기트 트라칸 왕조의 라자 토라 칸은 1421 ~ 1475년간 반세기 넘게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한편 그의 동생 샤 라이스 칸은 바닥샨에 망명, 그 군주의 도움으로 치트랄을 장악하고 트라칸 왕가의 방계인 라이시야 왕조를 세웠다.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각지에 동성 제후왕들을 두어 5세기 이상 이어지던 길기트의 트라칸 왕조는 1810년 라자 아바스가 사망한 후 길기트가 시크 왕국령이 되며 멸망하였다. 그리고 시크 왕국 역시 쇠퇴하자 기존 제후왕들이 길기트를 노리며 혼란기가 도래하였다.

2.2. 19세기의 혼란

트라칸 왕조의 멸망 후 사실상 빈 땅이던 길기트에 대해 인근 소왕국들은 쟁탈전을 벌였다. 우선 서북쪽 방면 야신의 라자 술레이만 샤가 길기트를 정복했다가, 곧 역시 서북쪽인 푸니알의 라자 아자드 칸이 그를 죽이고 길기트를 얻었다. 그리고 다시 동북쪽 방면 나가르 (부로샬)의 라자 타히르 샤가 아자트 칸을 죽이고 길기트를 점령하였다. 타히르 샤가 곧 사망하자 아들 샤 시칸다르가 계승했는데, 쿠쉬아크 가문 소속 야신의 라자 고하르 아만이 다시 그를 죽이고 길기트를 점령하였다. (야신-푸니알-나가르-야신) 전란이 계속되던 중 1841년 인더스 강이 하투 피르의 산사태로 밀려난 토사에 막혀 범람하며 길기트 일대의 협곡에 대홍수를 야기하였고, 이로써 기근이 발생하여 주민들의 고초를 격화시켰다.

1842년 샤 시칸다르의 동생 카림 칸이 카슈미르에 주둔하던 시크 군대의 도움으로 야신 병력을 축출, 재차 나가르 왕가의 지배가 정립되었다. 다만 나가르 국은 시크 왕국에 복속한 상태였고, 시크 장군 나투 샤는 길기트에 주둔하였다. 그러던 1846년 1차 영국-시크 전쟁을 마무리하는 암리차르 조약으로 길기트를 포함한 카슈미르 대부분 지역은 잠무의 도그라 왕조에게 넘어갔고, 카림 칸과 나투 샤는 도그라측 마하라자 굴랍 싱에게 복속하여 지방 행정을 맡았다. 다만 1848년 도그라 측에 굴복하지 않았던 훈자와 야신, 푸니알의 군주들이 연합하여 길기트를 공격하였고 카림 칸과 나투 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길기트는 훈자 령이 되었으나, 얼마 후 굴랍 싱이 파견한 도그라 군이 수복하였다.

이후 길기트에는 도그라 군이 주둔하였는데, 1852년 주민들은 억압적인 도그라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야신의 라자 고하르 아만은 주민들을 도와 도그라 군을 축출하고 길기트를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3번째 야신 번국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나, 1860년 고하르 아만의 사후 굴랍 싱의 후계자 란비르 싱이 3번째로 길기트를 점령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에 여러 차례 승리한 전적이 있던 란비르 싱은 1876년 아프가니스탄의 위협을 받던 치트랄 번국의 보호 요청을 수락하여 카슈미르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한편 러시아 제국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의 종주국 대영제국은 1877년 위구르파미르를 장악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카슈미르 북부에 길기트 전구를 설치하였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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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부 전경

길기트 전구 (Gilgit Agency)는 길기트 군과 훈자국, 나가르국, 푸니알-야신, 칠라스, 쿠흐가지르, 이슈코몬으로 구성되었다. 1935년 영국은 길기트 전구의 대부분 지역 (칠라스, 쿠흐가지르 등 제외)을 60년 조차하여 '길기트 훈자 및 카슈미르'라 불렀다. 영국 당국은 현지인들의 호응을 위해 아라인계 펀잡 무슬림이자 인도 독립 운동가 파르탑 싱의 측근인 압둘라 사힙을 초대 총독으로 선임하였다. 동시에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며 때때로 신장의 타지크 족이 길기트 인과 훈자의 쿤주티 인을 노예로 잡아가던 악습이 근절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잠무 카슈미르라다크였지만 영국의 보호 하에 사실상 자립해 있던 길기트 지방은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후 벌어진 카슈미르 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되었다.

2.3.1. 카슈미르 전쟁과 길기트 공화국

잠무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진나의 묵인 하에) 아자드 군이라 불리 파키스탄 민병대가 카슈미르를 침공하자, 잠무 카슈미르의 도그라 군주 하리 싱은 인도 연방에 병합을 신청하였다. (10월 26일) 이로써 인도 연방군이 투입되며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길기트 군부는 하리 싱의 인도 합병에 반대하며 독자 이슬람국인 '길기트 연방' 건국을 추진하였다. 다만 일부 전방 장교들은 파키스탄 가담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길기트의 영국인 고문 윌리엄 브라운은 반란을 주도하여 다타 켈 작전으로 잠무 카슈미르 제6 보병단과 민정 장관 간사라 싱을 무혈 축출하였다. 11월 1일, 길기트-아스토르 공화국과 지방 정부인 아부리 후쿠마트가 선포되었다. 브라운의 독자 행동에 영국 당국도 의외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

길기트-아스토르 공화국의 설립 후 라자 샤 라이스 칸이 대통령, (잠무 카슈미르 측에서 전향한) 미르자 하산 칸이 군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동시에 종교와 민족을 막론한 재산권 보장과 소수민족 보호가 약속되었다. 다만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브라운은 이미 정치 요원 압둘 카이윰 칸을 통해 파키스탄 편입을 요청해 둔 상태였고, 2일부터 파키스탄 국기를 내걸었다. 16일 파키스탄 군이 진주하여 행정을 장악하였고, 이로써 길기트 공화국은 2주만에 멸망하였다. 이듬해 1월 파키스탄측 장군 아슬람 칸이 길기트 군권을 이어받아 남하하였다. 파키스탄 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스카르두를 점령하며 발티스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지만, 스리나가르의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길기트는 현재까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주도이자 군사 기지로 남아있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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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가 마애불


[1] 길기트 지구 자체의 인구는 27만명[2] 해당 문서는 스리나가르의 스리 프라탑 싱 박물관과 델리 국립 기록관에 소장되었는데, 전자의 경우 2014년 카슈미르 홍수 당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에 파키스탄 측은 제대로 보관도 못하면서 돌려주지 않았다며 항의하였다[3] 새해 첫날 강을 따라 걸으며 바다트를 쫓는 주니페르 행렬이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르 잠시드는 16년간 재위한 후 아내 누르 바크트 하툰에 양위하였고, 그녀는 아들 가르그가 장성하자 그에게 양위하였다. 가르그는 55년간 통치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