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트라 북동부의 들리(Deli) 술탄국에 대한 내용은 인도네시아/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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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술탄국 دهلی سلطان(페르시아어) دہلی سلطنت(우르두어) दिल्ली सल्तनत(힌디어) | |||||
국기[1] | |||||
1300년대 투글루크 왕조 시기의 최대 판도[2] | |||||
1206년 ~ 1526년[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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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고르 왕조 | 무굴 제국 | ||||
세나 왕조 | |||||
야다바 왕조 | |||||
위치 | 인도 아대륙 | ||||
수도 | 라호르(1206~1210), 바다윤(1210~1214), 델리(1214~1327), 데바기리(1327~1334), 델리(1334~1506), 아그라(1506~1526)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술탄 | ||||
왕조 | 노예(맘루크, مملوک) 왕조 할지(خلجي) 왕조 투글라크(طغلاق) 왕조[4] 사이이드(سید) 왕조 로디(لودی) 왕조 | ||||
언어 | 페르시아어 (궁정어) 우르두어 (지배계급의 언어) 힌디어 (사실상의 공용어) 그 외 인도계 방언들 | ||||
민족 | 인도인[5] | ||||
종교 | 이슬람교 수니파[6]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수피즘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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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를 통치하던 이슬람 술탄국.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일 왕통이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5개에 달하는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 튀르크계 혹은 아프간계 무슬림 왕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남인도의 힌두교 왕국들과 대립하며 중세 인도 역사의 대미를 장식했고, 노예 왕조 시기 건립된 쿠트브 미나르 등 뛰어난 건축물들로 유명하다.
델리 술탄국의 첫 왕조인 노예 왕조[7]는 1206년 북인도를 평정한 고르 왕조를 꺾고 등장했다. 노예 왕조는 술탄 일투트미쉬의 재위기에 남방을 정벌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전성기를 찍었으나, 일투트미쉬 사후 급격히 무너지면서 결국 1290년 할지족이 세운 할지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할지 왕조는 술탄 잘랄웃딘, 술탄 알랄웃딘의 통치하에서 몽골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고 남부의 호이살라 왕국, 카카티야 왕조, 판디아 왕국 등을 멸망시켰다. 특히 개혁적인 면모가 강했던 술탄 알라웃딘은 몽골인 대학살, 금주령, 도박 금지, 마리화나 금지 등 수많은 정책들을 발표하며 사회적 대격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할지 왕조 역시 술탄 알라웃딘 사후 빠르게 붕괴했다. 할지 왕조의 신하들은 가지 말리크[8]를 새로운 델리의 술탄으로 추대했고, 이로인해 투글루크 왕조가 열렸다.
델리 술탄국의 세 번째 왕조인 투글루크 왕조는 델리 술탄국의 역사상 최대 강역을 달성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투글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면서까지 남인도의 소왕국들 정복에 열을 올렸고, 덕분에 델리 술탄국은 인도 최남단의 카르나타카까지 진출해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투글루크 왕조 역시 술탄 무함마드 사후 서서히 쇠퇴했고, 내전과 재앙이 겹쳐 일어나면서 투글루크 왕조는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했다. 쇠퇴한 투글루크 왕조의 목숨을 끊은 것은 바로 정복군주 티무르였다. 1398년 티무르는 델리를 침공, 8일 밤낮으로 델리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면서 투글루크 왕조를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렸다. 안그래도 망해가던 투글루크 왕조는 티무르의 침공 이후 완전히 끝장났고, 이후 티무르의 신하를 자처한 키즈르 칸이 투글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1414년 사이이드 왕조[9]를 개창했다.
티무르의 봉신국을 자처한 사이이드 왕조 시기의 델리 술탄국은 5개의 왕조들 중 제일 약한 국력을 지녔던 왕조로, 존속 기간 내내 위태롭게 혼란하였다. 키즈르 칸과 그 후계자 무바라크 샤는 델리 술탄국이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기 위해 발버둥쳤으나 옛 투글루크 왕조 시절의 넓은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영 무리였다. 무바라크 샤 사후 허수아비 술탄들이 즉위하며 사이이드 왕조는 날로 약해졌다.
결국 최후의 술탄인 알람 샤가 펀자브의 유력 귀족인 로디족 출신의 바흐룰 로디에게 양위하면서 델리 술탄국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가 등장했다. 바흐룰 로디의 아들이자 제2대 술탄인 시칸다르 로디는 괄리오르 지방 정벌, 1504년 아그라 건설, 경제 개혁, 왕권 강화, 예술 장려 등 여러 정책들을 펴나가며 로디 왕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시칸다르 로디 사후 즉위한 이브라힘 샤는 아버지와 달리 천상 무인이었기에 통치자로서는 자질이 부족했다. 결국 이브라힘 샤에 반발한 귀족들이 카불의 왕이었던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답한 바부르가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이브라힘 샤를 꺾으면서 델리 술탄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델리 술탄국 멸망 이후 북인도에는 무굴 제국이 들어섰다.[10]
2. 배경: 이슬람의 인도 침입과 정착(가즈니 왕조와 고르 왕조)
델리 술탄국의 건국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인도사와 아랍-튀르크 이슬람 세계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한 아랍 일대에서는 점차 아바스 왕조 칼리파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칼리파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 무슬림 군벌들이 각기 독자적인 왕국들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 군벌들은 대부분 옛 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한 노예 출신인 튀르크계 맘루크 혈통이 흐르는 자들이었다. 옛날에야 맘루크들이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슬림이 되어 노예신분으로 주인들을 지키는 존재였지만, 칼을 쥔 자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시간이 흘러 맘루크들이 이슬람 세계를 이끄는 지도층에 편입된 것이다. 이 맘루크 출신의 군벌들은 유명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포함해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까지 집권하여 세력을 뻗쳤고, 이후 서아시아 지방을 넘어 비옥한 인도 아대륙 지방에까지 진출하려 들었다.맘루크들이 풍요로운 인도 지방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할 즈음 인도에는 이미 수많은 힌두교, 불교계 소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주, 농경민족들이 항상 그렇듯이 인도 토착 왕국들은 기병, 개중에서도 유목민족 출신들이 많았던 튀르크인들의 침공을 감당하기에는 무력이 너무 약했다. 맘루크 출신의 군벌들이 수많은 기병들과 튀르크인들을 이끌고 인도를 침략하자 북인도의 소왕국들은 말그대로 쓸려나갔고, 이들에게 대항할만한 힘을 가진 세력은 당대 인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수많은 무슬림 세력들이 북인도를 헤집고 다녔지만 개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던 인물은 바로 가즈니 왕조[11]의 창시자인 술탄 마흐무드였다. 튀르크계 노예인 맘루크의 아들이었던 마흐무드는 997년과 1030년 사이에 야무나 강 인근의 인도 왕국들을 무려 17번이나 침략하여 힌두 인도인들이 치를 떨 정도로 활발한 군사활동을 펼쳤다. 다만 마흐무드는 펀자브 지방 서부 일대만을 점령하는 데 그쳤고, 다른 지역들도 약탈은 하되 직접적으로 통치하려 들지는 않았다.
술탄 마흐무드 사후에도 수많은 무슬림 군주들이 인도와 서아시아를 넘나들며 힌두, 불교 왕국들을 수없이 약탈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마흐무드와 비슷하게 인도를 정복해서 내가 다스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그저 인도의 부유한 왕국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재물들을 약탈하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본격적으로 인도에 정착하고 인도의 군주로써 인도인들을 통치하려 들었던 인물은 대표적으로 고르 왕조 출신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가 있었다. 무함마드는 1173년 북인도를 정복해 직접 다스리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덕분에 무함마드는 델리 일대를 포함한 북인도 상당 영역을 정복했고, 또한 가즈니 왕조의 옛 세력들도 흡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북인도 지방에 무슬림 왕조가 들어설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고르 왕조의 좋은 날도 잠시, 1206년에 무함마드가 암살당하자 고르 왕조는 대단히 빠르게 쇠퇴했다. 고르 왕조가 무너진 다음 북인도에서 무함마드의 휘하 장군 출신이던 쿠트브 우딘 아이바크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니, 이 왕조가 바로 델리 술탄국의 첫 번째 왕조인 노예 왕조였다.
3. 역사
3.1. 노예 왕조 (1206~1290)
자세한 내용은 노예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쿠트브 미나르 | 노예 왕조의 강역 |
아이바크는 즉위 직후 물탄을 차지한 카바차 장군 및 가즈니를 차지한 얄두즈 장군과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인도 내의 영토들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이바크는 순수하게 인도의 술탄이 되어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부 이슬람 세계와 확연히 문화적, 사회적으로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바크는 1206년부터 1210년까지 술탄으로 재위했다. 그는 라호르를 수도로 잡고 델리를 거점으로 북인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델리 최초의 모스크들 중 하나였던 쿠트브 미나르를 건설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술탄 아이바크는 라호르에서 폴로를 하던 중 낙마하여 입은 부상으로 결국 121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알람 샤가 새로운 델리의 술탄으로 즉위했다.
알람 샤가 새로운 술탄이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바크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덜컥 왕좌를 차지한 것이었고 왕국 내에는 그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넘쳐났다. 벵골의 귀족 등을 포함한 무슬림 귀족층이 알람 샤에게 반기를 들었고, 40명의 귀족 대표들이 모여 우타르프라데시 총독이었던 샴스 웃 딘 일투트미쉬에게 새로운 술탄이 되어주십사 요청했다. 당연히 일투트미쉬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한 후 델리로 진군했고, 1211년 델리 인근의 주드 평원에서 알람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델리 술탄국의 제3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일투트미쉬는 1211년부터 1236년까지 재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216년에는 호라즘 왕조의 침략으로 가즈니 지방을 다스리던 얄두즈가 인도로 쫒겨와 일투트미쉬에게 인도 내의 지분을 요구하자 단칼에 거절하고 얄두즈를 숙청해버렸다. 또한 라호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카바차 장군과도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한편 이 일투트미쉬의 재위기에 몽골 제국의 대침공이 일어났다. 자신의 사신들을 모욕한 것에 대노한 칭기즈 칸이 군대를 몰아 호라즘 왕조를 공격하자, 몽골 기병의 위력에 놀란 호라즘 왕조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때문에 이미 북인도 상당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델리 술탄국과도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일투트미쉬는 몽골 기병의 악명을 전해들었는지 아니면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호라즘 왕조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심지어 영토 내부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공세를 펼치지도 않은 채 철저한 수세 위주의 전략을 폈고, 나중에 1224년에 호라즘 왕조가 완벽히 패망하고 몽골군도 어느 정도 물러갔을 무렵에서야 다시 인더스 강 유역, 그리고 그 동쪽 영토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호라즘군과 몽골군이 물러가면서 왕국 서부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일투트미쉬는 인도 동부를 정복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227년에는 벵골을 집어삼켰고, 1226년에는 란탐보르를, 1227년에는 술탄 아이바크 사후 독립을 선포했던 만달로어 지방을 재합병했다.
1228년에는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려 인더스 강 유역을 침공했다. 일투트미쉬는 물탄을 지배하던 카바차 장군을 꺾고 펀자브와 신드 주의 거대한 영토를 합병했으며, 이렇게 델리 술탄국이 승승장구하면서 점점 위세가 커지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는 일투트미쉬에게 인도 내의 전 무슬림들을 다스릴 권한을 인정하면서 그의 인도 내 권위를 일부러 높여주기까지 했다. 일투트미쉬는 칼리파의 정식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펼치면서 델리 술탄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벵골의 반란을 진압했고 마디아프라데시를 점령했으며 빌사와 우자인 지방을 성공적으로 합병했다. 일투트미쉬의 업적은 단순히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았다. 일투트미쉬는 체계적인 조세와 조세 효율을 위하여 은화와 동화를 국가에 도입하고 관료들의 계급을 확립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많은 일들을 했다. 또한 수많은 궁전과 모스크, 건물들을 지어 술탄의 위엄을 드높였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까지 짓는 등 노예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노예 왕조는 일투트미쉬 사후 점차 쇠락했다. 제4대 술탄 루쿤 웃 딘 페로즈는 국정에 관심이 없어 정무를 모후에게 맡기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7개월만에 보다못한 귀족들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5대 여성 술탄인 라지아 술타나 역시 아프리카계 흑인 귀족을 가까이 하면서 튀르크계가 주류였던 귀족들의 반감을 사 결국 쫒겨났다.[14]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무이즈 웃 딘 바흐람은 귀족들의 지원을 뒤에 업고 라지아 술타나의 군대를 깨부순 다음 왕위를 찬탈했다.[15] 그러나 제6대 술탄 바흐람의 통치도 1240년부터 1242년까지 2년여를 가지 못했다. 바흐람 치하의 델리 술탄국은 빠르게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귀족들은 편가르기에 빠져 집안 싸움을 일삼았고, 몽골 군대가 라호르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같은 위기 속에서 술탄 바흐람은 유약한 대응을 하면서 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결국 바흐람은 델리의 요새에 갇혀 유폐되었고, 1242년에 바흐람이 사망하자 제7대 술탄인 알라웃딘 마수드가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즉위했다. 알라웃딘은 술에 빠져 국정을 방기했으나, 점차 권력 문제로 귀족들과 다툼이 생겼고 결국 4년 만인 1246년에 귀족들에게 쫒겨나고 말았다.
대귀족들이 알라웃딘을 쫒아내고 제8대 술탄으로 옹립한 이는 알라웃딘의 사촌이자 명군 일투트미쉬의 손자였던 나시룻딘 마흐무드였다. 나시룻딘은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대신 종교에 깊이 심취한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고 약자와 빈곤층들을 도와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술탄이 종교에 빠져 국무를 보지 않았으니 국정은 대부분 섭정을 맡고 있던 기야스 웃 딘 발반이 맡아 처리했다. 이렇게 종교에만 빠져 산 덕택에 술탄 나시룻딘은 약 2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술탄직을 지킬 수 있었다. 1266년 나시룻딘이 사망하자 섭정 기야스 웃 딘 발반이 제9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기야스 웃 딘 발반의 치세에 노예 왕조는 잠깐의 중흥기를 맞는 듯 보였다. 발반은 북인도 전체에 델리 주도하의 질서 확립을 위해 힘썼고, 대귀족들의 세력을 분쇄했으며 몽골군의 끊임없는 침략에도 빠르게 대응했다. 왕권강화에 엄청난 신경을 쏟았던 술탄 발반 덕분에 델리 술탄국은 잠시 동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포악한 발반의 무리한 왕권 강화는 내실이 영 부족했다. 1287년 발반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제10대 술탄이자 마지막 술탄인 무이즈 웃 딘 무함마드 카이카바드가 즉위했다. 그러나 카이카바드는 즉위 당시 13세로 워낙 어렸던 탓에 국정에 관심이 없었다. 4년 후 그가 급성마비로 병세가 악화되자 1290년 할지족 출신의 신하 잘랄 웃 딘 할지가 그를 암살했고, 이로 인해 노예 왕조는 85년 만에 무너졌다.
3.2. 할지 왕조 (1290~1320)
할지 왕조의 강역[16] | 알라웃딘의 초상화 |
할지 왕조는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권력구조를 유지했던 이전의 노예 왕조와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계열이나 타 인도 무슬림들에게 높은 관직을 제공하는 등 보다 관용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잘랄웃딘이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할 당시 이미 그의 나이는 70세에 달하는 굉장한 고령이었다. 인자한 노인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잘랄웃딘은 온화한 성품과 유하고 자비로운 성격으로 유명했고,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델리 시민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18] 그러나 일부 귀족들, 개중에서도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튀르크계 귀족들은 잘랄웃딘의 온화함을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옛 왕족들의 지도자이자 술탄 발반의 사촌이었던 말리크 카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니푸르에서 반란을 일으킨 말리크는 술탄을 자칭하며 델리로 진군했으나 어이없이 잘랄웃딘에게 패배했고, 이로 인해 노예 왕조의 복위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19]
노예 왕조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확고히 델리의 술탄이 된 잘랄웃딘은 반란 진압 얼마 후인 1292년 침공한 몽골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후에는 한창 확장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며 델리 술탄국을 위협하던 란탐보르 지방의 카하마나 왕국을 침공했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카하마나 왕국으로 진군한 잘랄웃딘은 만다와르, 자인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잘랄웃딘은 난공불락의 란탐보르 요새에 이르자, 요새 공략에 지나치게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고 란탐보르 공략을 포기했다. 술탄의 측근들은 잘랄웃딘의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그의 사촌이던 아흐마드는 술탄이 란탐보르를 치지 않는다면 힌두교 소왕국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으나, 술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잘랄웃딘은 그대로 회군해 돌아갔다. 당연히 이런 관용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는 무슬림들도 존재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잘랄웃딘의 조카이자 양아들이었던 알라 웃 딘 할지가 있었다.[20] 아와드의 총독이었던 알라웃딘은 잘랄웃딘의 관용정책에 반발했고, 잘랄웃딘이 카라를 방문하던 중 그를 살해한 후, 1296년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21]
잘랄웃딘을 살해하고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한 알라웃딘은 상당히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즉위 이전부터 데칸 고원과 야다바 왕조의 데바기리 요새를 박살내며 전적을 세운 알라웃딘은 1296년 델리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이던 자파르 칸, 누스라트 칸, 말리크 카푸르 등을 고위 관료에 임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튀르크계가 아닌 토착 인도계 출신 무슬림들이었다.[22] 알라웃딘이 술탄으로 즉위한 직후, 당연히 전대 술탄을 살해하고 왕좌를 찬탈한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전국에 넘쳐났다. 라호르 일대는 몽골의 침략에 시달렸고, 물탄 지역은 잘랄웃딘의 아들이던 아르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알라웃딘은 빠르게 대응했다. 제일 먼저 물탄에 군대를 파견하여 아르칼리를 쳐죽였고, 델리의 궁정에도 숙청을 일으켜 자신을 편들지 않았던 수많은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했으며 남아있는 잘랄웃딘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거나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1297년 겨울, 차가타이 칸국의 몽골 군대가 침략해들어오자 알라웃딘은 군대를 보내 20,000명의 몽골 병사들을 학살했고, 그에 맞먹는 수의 몽골인들을 포로로 잡아 델리에서 공개처형해버렸다. 그는 또한 잘랄 웃딘 시절에 델리에 정착하며 살고 있던 몽골인들을 대량으로 살육했다.[23] 알라웃딘은 1305년, 2차례에 걸친 침공 작전 끝에 마침내 구자라트 지역을 정복했고, 이후 구자라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때, 반란군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들까지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몽골군은 1306년과 1307년에 걸쳐서 인도 북부를 계속 침공했는데, 알라웃딘은 30,000명에 달하는 기병들을 몰고 이들을 모두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위협이 사라지자 알라웃딘은 남인도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1308년에는 잘랄웃딘 시절 공략을 포기했던 데바기리 요새를 쳐서 함락시키고 야다바 왕조를 봉신국으로 삼았으며, 텔랑가나의 카카티야 왕조를 침공하고[24] 인도 남단의 판디아 왕국, 호이살라 왕국 등 부유한 힌두계 왕국들을 모두 무릎꿇리고야 말았다.[25]
알라웃딘은 정복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도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세금을 걷던 이전의 방식을 폐지하고 직접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였으며,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고[26] 시장의 필수품 가격을 통제했다. 또한 사창가를 폐지하고 델리의 모든 창녀들을 강제로 결혼시켰으며, 도박, 마리화나 등 인간의 심성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유흥업소들을 금지했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서 귀족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특혜들을 폐지했다. 거기다 반란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귀족들 사이의 연회를 금지시키고 정략결혼 또한 자신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귀족들 사이에 스파이까지 심어둬서 그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도록까지 했다. 이와 같은
알라웃딘은 재위 말년 편집증이 심해져 일부 측근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믿지 못하며 수많은 신하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댔다. 그가 유일하게 믿던 사람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최측근이었던 말리크 카푸르였는데, 카푸르는 의심병에 걸린 술탄을 뒤에서 조종하면서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등 자기 입맛대로 술탄국을 좌지우지했다. 알라웃딘은 1316년 1월 4일 밤에 사망했다.
알라웃딘이 사망한 직후 카푸르가 술탄에 올랐으나, 당연히 사람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카푸르는 몇 달도 되지 못해 술탄좌에서 쫒겨났다. 신하들은 카푸르 축출 이후 6세의 어린 시하브 웃 딘 오마르를 새 꼭두각시 술탄으로 옹립하고 그 형인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를 섭정으로 세웠다. 그러나 쿠트브 웃딘 무바라크 샤는 반란을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술탄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유력 가문이었던 튀르크계 귀족인 말리크 가문의 가지 말리크를 펀자브의 군사령관에 봉하는 등 환심을 사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4년 만에 쿠스라우 칸 장군에게 암살당했다. 할지 왕조 최후의 술탄이었던 쿠스라우 칸은 반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 출신의 노예였다. 그러나 뛰어난 무예로 술탄 알라웃딘의 눈에 들었고, 덕분에 알라웃딘의 원정군을 지휘하는 장군직에까지 오르는 등 인생역전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했다. 1316년 알라웃딘이 사망하고 그 후임 술탄들이 연이어 궁정 쿠데타와 암살로 사망하자 쿠스라우 칸은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보다가 술탄직마저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1320년 6월 술탄에 등극한 쿠스라우 칸은 알라웃딘의 직계 아들들을 포함한 할지 왕가의 일족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심지어 반이슬람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기존의 권력층들과 극한의 대립각을 세웠다. 당연히 무슬림 귀족들과 델리 술탄국의 관료들은 속으로 천한 힌두 노예 출신이라 혐오하던 쿠스라우 칸이 좋게 보일 리 없었고, 이에 반발한 신하들은 가지 말리크에게 새 술탄이 될 것을 요청했고, 가지 말리크는 델리로 진군해 찬탈자 쿠스라우 술탄을 죽이고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1320년 가지 말리크는 술탄 즉위 후 이름을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로 개명하고 투글루크 왕조를 개창했다.
3.3. 투글루크 왕조 (1320~1414)
투글루크 왕조의 강역 | 피루즈 샤 투글루크 |
할지 왕조를 꺾고 델리 술탄국을 차지한 기야스 알 딘 투글루크는 튀르크계 귀족과 인도계의 혼혈 혈통이었다. 기야스 알딘 투글루크는 즉위 직후 무슬림들에 대한 세율을 낮추고 대신 힌두교도들에 물리는 세금을 높이면서 친이슬람 정책들을 펴나갔다. 또한 끊이지 않고 인도를 침공해들어오는 몽골에 대해서는 대단히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몽골의 사신단을 죽이거나 델리 동쪽 6km 즈음에 투글라카바드 요새를 지어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몽골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보였다. 1323년에는 아들이었던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에게 남쪽 카카티야 왕조를 치도록 명령했고, 결국 수도 와랑갈을 함락시키면서 카카티야 왕조를 끝장내고 완전히 델리 술탄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이후에도 아란갈, 틸랑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성공적으로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술탄 기야스는 무함마드를 자신의 후계로 삼겠노라 공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325년 기야스가 사망하면서[27]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술탄위를 승계했다.
투글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인도 정벌을 위해 1327년에 수도를 다울라바트[28]로 천도했고, 수도까지 옮기면서 정복에 매진한 보람이 있었던지 투글루크 왕조는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 치하에서 델리 술탄국 역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29] 무함마드는 현 텔랑가나의 와랑갈, 말라바르, 마두라이를 정복해 델리 술탄국의 영향력 아래에 넣었고, 정복 활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인도 최남단의 카르나타카까지 다다르기도 했다.[30]
1330년과 1350년의 강역 비교 |
한편 무함마드는 정복 외에도 여러 분야의 정책을 펼쳤다. 그가 진행한 사업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수도 천도 사업이었다. 새로운 수도로 정한 다울라타바드를 델리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성장시키고 싶었던 무함마드는 모든 정부 기관들을 다울라바트로 옮겼으며, 다울라바트를 완전한 계획도시로 설계하여 인도 곳곳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을 직업별, 계급별로 나누어 살게 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31] 또한 다울라바트를 중심으로 인도 전역에 넓고 평탄한 길을 깔고 일정 거리마다 역참을 설치했으며, 1333년에는 다울라바트에 아예 조폐청을 두고 동전을 발행했다. 또한 무함마드 본인은 대단히 독실한 무슬림이었으나, 타 종교에도 상당히 관대한 면모가 있어서 심지어 힌두교 축제에 공적으로 참가하는 등 델리 술탄국에서 손꼽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신드 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1351년 사망하자 투글루크 왕조의 세력도 함께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인도 아대륙이라는 대륙의 특성상 문화나 사회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던 남인도가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델리 술탄국에 자연스레 합쳐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무함마드 정복 직후에도 남인도 지방에서는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무함마드가 1351년 사망하자 그가 정복한 지방들은 모조리 바흐마니 술탄국, 자운푸르 술탄국, 벵골 술탄국, 구자라트 술탄국, 말와 술탄국, 비자야나가르 왕국, 메와르, 물탄, 신드, 곤드와나 등등 수많은 소왕국들로 떨어져 나갔다. 무함마드 사후 그의 친척인 마흐무드 이븐 무함마드가 잠시 술탄에 올랐으니 1개월도 되지 않아 쫒겨났다. 이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45세의 피루즈 샤 투글루크가 술탄에 올랐다. 피루즈는 무함마드에 비해서 훨씬 온건하고 평화주의적인 술탄으로 약 37년간 재위했다. 피루즈 재위기의 델리 술탄국은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굉장히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기할만한 전쟁이나 대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32]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무함마드만큼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힌두교도들에게 부과된 지즈야 세금은 날로 상승했고 시아파 등 기타 이슬람 종파들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또한 이슬람에서 타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혹형을 가하기도 했다. 무함마드만한 군재가 없었던 피루즈는 무함마드가 정복했던 남인도와 벵골 지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용인했고, 벵골 재정복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피루즈가 죽기 약 4년 전인 1384년, 델리 술탄국에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피루즈가 가장 아끼던 아들 칸 자한 1세는 1368년 사망했고, 칸 자한 1세의 아들인 칸 자한 2세가 술탄의 총애를 한몸에 입었던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재상이 되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칸 자한 2세는 점차 욕심이 커져 조부인 피루즈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인 무함마드 샤 투글루크를 제치고 술탄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술탄에게 무함마드 샤를 내치고 자신을 후계로 삼을 것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정작 피루즈가 택한 것은 칸 자한 2세의 재상직 박탈이었다. 결국 분노한 칸 자한 2세가 군대를 일으키며 내전이 일어났다. 무함마드 샤 역시 1387년에 추방되었고 1년도 되지 않아 피루즈가 사망했다.
피루즈 사망 후 어찌어찌 왕위를 계승한 무함마드 샤는 칸 자한 2세의 군대를 격파, 1390년에 내전을 종결했고 칸 자한 2세를 따르던 모든 귀족들을 숙청했다. 수도 델리에서 난립상이 지속되자 기회만을 노리던 지방의 힌두교도들, 그리고 무슬림 귀족들이
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 삽화 |
무함마드 샤가 죽자 아들 후마윤 칸 투글루크이 새 술탄이 되었으나 2개월만에 암살당했고, 연이어 즉위한 나시르 웃 딘 마흐무드 샤는 귀족들에게 영 인기가 없었다. 이쯤되자 델리 근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동부와 서부 영토들을 잃어버려 군웅할거 상태로 전락해버렸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델리의 귀족들 사이에서 또다시 갈등이 일어나면서 1394년에 또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은 술탄까지 끊임없이 갈아치워지는
3.4. 사이드 왕조 (1414~1451)
무함마드 샤의 무덤 |
키즈르 칸이 델리의 지배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티무르의 힘을 빌려 어부지리로 얻은 자리였기에 함부로 델리의 술탄을 자칭하지는 못했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티무르의 충성스러운 봉신이라 부르며 몸을 낮추었고, 죽을 때까지 델리 술탄의 칭호를 쓰지 않았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침공으로 델리 술탄국이 잃어버린 영토들을 되찾기 위하여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고토를 회복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고, 실제로 괄리오르, 바야나 지방들을 수복하기도 했다. 키즈르 칸은 즉위 7년만인 1421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키즈르 칸의 아들 무이즈 웃 딘 무바라크 샤가 새 군주로 즉위했다.
1421년 즉위한 무바라크 샤 역시 아버지를 이어 옛 델리 술탄국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회복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재도 없었던 무바라크 샤가 수많은 소왕국과 반란군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승리를 거두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고, 결국 무바라크 샤는 인명 피해만 낸 채로 유야무야 세월을 보냈다. 1434년 무바라크 샤가 세상을 떠나자 무함마드 샤 사이드가 대귀족 살와르 울 물크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무함마드 샤는 필사적으로 살와르 울 물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한 채 허수아비 술탄으로 살았다. 그 와중에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사이이드 왕조 시기의 델리 술탄국은 옛 투글루크 왕조 시절의 강성함은 찾기 힘들 정도로 쇠락해 버린 상태를 유지했다.
무함마드 샤는 1443년에 사망했고, 이후 최후의 사이이드 왕조 계열 술탄인 알람 샤가 술탄이 되었다. 이때 아프간계의 신흥 강자 로디족의 바흐룰 칸 로디가 쳐들어오자 알람 샤는 망가져버린 사이이드 왕조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1451년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로디족의 바흐룰 로디에게 양위하면서 델리 술탄국 최후의 왕조 로디 왕조가 창건되어 사이이드 왕조는 끝을 맺게 되었다.
3.5. 로디 왕조 (1451~1526)
자세한 내용은 로디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로디 왕조의 강역 | 이브라힘 로디의 초상화 |
바흐룰 로디는 1479년 자운푸르 술탄국을 병합했고 1486년에는 제 아들인 바브라크 샤를 자운푸르의 총독으로 임명해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델리의 술탄들이 으레 그랬듯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반란들을 진압하는 한편 괄리오르, 자운푸르, 우타르프라데시 북부에 대한 델리 술탄국의 영향력을 확고히하는데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바흐룰 로디가 첫째인 바브라크 샤를 자운푸르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물밑에서 후계 갈등이 촉발되었다. 당시 가장 능력있고 귀족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인물은 바흐룰 로디의 둘째 아들인 시칸다르 칸 로디였는데, 바브라크 샤가 자운푸르를 장악하면서 후계구도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바흐룰 로디는 시칸다르 샤를 죽기 전 공식 후계자로 지정하고 1489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으나 결국 내전이 터지고야 말았다. 이 내전에서 시칸다르 샤가 승리했고, 그는 로디 왕조의 제2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시칸다르 샤는 즉위와 동시에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과 정복 정책을 동시에 펴면서 델리 술탄국의 국력을 키우려 노력했다. 모든 귀족들이 왕 앞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서있도록 만들면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했고, 측량법 제정, 물품입시세 폐지 등 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지에 도로를 깔거나 문학과 예술, 건축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35] 특히 현대 인도의 대도시들 중 하나인 아그라 역시 1504년 시칸다르 샤가 처음 건설했다. 시칸다르 샤는 영토 확장에도 신경을 썼다. 괄리오르 지방의 지배자였던 마나심하 토마르가 델리 술탄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델리 내의 반란군을 지원, 시칸다르 샤를 쫒아내려 시도하자 시칸다르 샤는 몇 년에 걸쳐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괄리오르 일대를 점령해 델리 술탄국의 지배를 확고히 하려 애썼다. 매번 공격을 할때마다 전염병이 돌면서 마나심하 토마르를 직접 사로잡지는 못했으나, 시칸다르 샤는 괄리오르 일대를 비롯한 비하르 등 여러 지역들을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1517년 시칸다르 샤가 괄리오르 정복을 준비 중 역병으로 사망하자 시칸다르 샤의 막내아들인 이브라힘 칸 로디가 델리의 술탄이 되었다. 이브라힘 로디는 군사적 재능과 무예 하나만큼은 정말 타고난 무인이었으나 참을성과 지성이 부족해 군주감으로는 실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뛰어난 통치력으로 각지를 잘 다스렸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협상이나 정치력이 전혀 부재했던 이브라힘 로디가 델리 술탄국의 광대한 영토와 소왕국들을 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수많은 도시와 왕국들이 독립을 선포했고, 이브라힘 로디는 그와중에 귀족들을 제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면서 아프간계 귀족들의 신임도 잃어버렸다. 이브라힘 로디에 실망한 귀족층은 한창 세를 불리고 있었던 당시 카불의 왕 바부르에게 델리의 술탄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1526년 무굴 제국의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브라힘 로디를 꺾어버렸다. 당시 바부르는 12,000에서 25,000 정도의 병사와 20~24문의 대포를 지니고 있었고, 이브라힘 로디는 50,000~120,000명의 대군과 400~1,000여 마리의 엄청난 대병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미 내부가 분열된 이브라힘 로디가 한창 떠오르는 신성이던 바부르를 꺾는 것은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20,000명에 달하는 델리 술탄국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델리 술탄국이 멸망하고 델리에는 인도 최후의 대제국인 무굴 제국이 들어섰고, 무굴 제국은 이후 무려 331년에 달하는 오랜 시간 동안 인도를 통치하게 된다.[36]
4. 정치
12세기 말경 북인도 지역에서 튀르크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는 점차 강력한 힘을 가진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로 변모했다. 그후 15세기경까지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로 이어져 내려온 델리 술탄 왕조는 점차 붕괴되면서 몇 개의 독립국가 형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술탄의 행정 조직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했으며 무굴 제국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비록 인도 내에 있는 튀르크계 술탄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의 충성스러운 대리인이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당시 아바스 왕조는 그 권위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는 칼리파 그 자체가 형식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이 정치, 사법, 군사의 모든 권한을 누리며 다스리는 지역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델리 술탄 왕조의 왕위 계승의 법칙은 보통 그 후손이 물려받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장자가 그 지위를 이어가진다는 법칙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아들들이 똑같이 술탄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몇몇은 장자가 아닌 다른 자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노예 왕조의 일투트미쉬의 경우, 후계자로 아들이 아닌 딸이었던 라지아 술타나를 지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노예 왕조문서를 참조. 거기다 술탄이 혼자서 그 후계자를 지목할 수도 없었고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술탄들은 지위를 성공적으로 계승시키기 위해서 군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그걸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반란과 내전, 쿠데타, 그리고 술탄들의 암살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술탄들은 보통 자신이 임명한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재상들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고 행정체계는 13세기 말경이 돼서야 확립되어진다. 행정 조직에 있어서 핵심은 '와지르'였다. 초기에 와지르는 장군을 뜻했는데 14세기에 이르면서 재정업무의 전문가로 성격이 변질되어 세입을 담당하는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무함마드 투글루크는 재정분야의 조직에 관심을 기울여 원정을 나갈 때에도 당시 널리 신망받는 와자르인 크와자 자한을 반드시 수도에 남겨두었다.
와지르 다음으로 중요한 부서는 국방을 담당하는 다완이 아르즈였으며 이 부서의 장을 '아리즈 이 마마릴크'라고 불렀다. 하지만 군대의 총사령관은 아리즈가 아니라 술탄 자신이 직접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의 지휘관이 자신을 배반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이 국방부서를 처음으로 독립시킨 것은 할지 왕조 때였다. 이 밖에도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완 이 리살라트'가 있었고 그들의 수장은 사법부의 수장도 같이 맡았다. 그들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라》에 근거한 법을 만들어 모든 무슬림들이 실행하도록 했다. 그에 반해 힌두교에 대해선 촌락과 도시의 경우를 따로 나누고 각 계급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제정된 자신들의 법에 따르도록 자치를 허용했다.
튀르크인들은 정복한 지역을 튀르크계 귀족이 이끄는 '이크타스'라는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후에 현으로 번역되는 이크타스는 사실상의 영주가 통치하는 봉건제 영지로써《무크티스》라는 독립적인 법을 제정하고 토지세를 받아 그것으로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하는 등 모든 업무들을 독자적으로 시행했다. 그들의 결집력은 중앙 정부의 힘에 반비례했다.
5. 사회
델리 술탄 왕조 시대의 일상인들의 삶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데 영 관심이 없었던 전통 인도인에 비해 외래의 영향을 받았던 델리 술탄국 전후를 기점으로 인도사의 기록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왕궁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이 넘치는데 아무래도 당시 정치상황들이 워낙 이리저리 급변해서 사학기록들은 그쪽으로 쏠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세기에 인도를 방문하여 무함마드 투글루크의 궁정에서 8년간 머물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닌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븐 바투타이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귀중한 기록들을 남겨 놓았다. 이븐 바투타는 당시 델리 술탄 왕조 지방들의 산물을 일일이 열거했고, 땅이 매우 비옥하여 평균적으로 2번씩 작물을 수확했으며 쌀은 일년 삼모작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참깨, 사탕수수, 면화 등이 생산되어 촌락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고 했다.대부분의 평민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업의 발달이 있어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델리는 동부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으며 다울라바트 역시 델리 못지않은 지역으로 인도 북부와 남부의 교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외국 무역의 주도권은 주로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 잡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도인 무역상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37] 인도에서 생산된 직물은 직조술의 발달로 페르시아나 홍해지역으로 수출되었고 이 품목들은 중국의 비단보다도 훌륭한 상품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 가운데 타밀인과 구자라트인들이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을 했으며 북인도와의 연근해 무역은 자이나교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 거의 독점했다.
델리 술탄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의 세력이 인도를 지배했었지만 그렇다고 인도의 중심 중교인 힌두교를 변화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을지언정 전체적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브라만이 중심이 되는 카스트 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거기다 사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 또한 변한 것이 없었다. 여성은 여전히 조혼을 하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을 최상의 의무로 여겼으며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파혼이나 이혼은 몸에 불치병이 있다든가 큰 장애가 생겼다든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특수한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당연히 여자들은 재혼도 불가능했다. 남편이 사망한 경우 함께 화장하는 힌두교의 사티 제도에서마저 부인의 미덕으로 존속했을 정도였다. 여기다가 이슬람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더더욱 남성에게 의존하는 위치로 전락했다.
델리 술탄 왕조 시대의 인도 사회는 주로 종족과 인종, 종교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슬람 외래인 출신이 최상위층, 현지인 무슬림이 중간층, 비무슬림 토착인이 최하위 카스트였다. 그래서 튀르크인, 이란인, 아프가니스탄인, 아랍인, 인도인이 서로 통혼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거기다 힌두교와 이슬람간의 결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38]
6. 기타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토착인을 정복하고 외래왕조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중국사에서의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의 중국대륙을 정복한 침투왕조 · 정복왕조(북조)에 비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권의 문물을 수용하여 중국화된 중국의 북방민족들과는 달리 또다른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도래한 인도의 델리 술탄국은 인도 아대륙을 힌두와 이슬람으로 갈라놓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처럼 인도 일부 지역을 무슬림화시키는 기점으로 작용하였으며 이 문화적 갈등은 마침내 현대 인도 분단의 기원을 초래하였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사실 비중이 영 많이 나오지 않는 세계사의 인도사 서술에서 현 인도의 정치적 중심지가 북인도이기에 그나마 북인도를 통치했던 델리 술탄국에 대한 파트는 비교적 많이 나오는 편이다. 남인도를 통치했던 무슬림 왕조인 데칸 술탄국이 아예 듣보잡 수준인 것에 비하면 인도사의 주류로써 대우하는 편.
7. 파생된 국가 목록
8. 관련글
[1] 정확히는 투글루크 왕조의 군기(軍旗)[2] 주황색 선은 21세기 기준 국경이다.[3] 델리 술탄국의 영토 변천사. 왼쪽 위부터 옆으로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 로디 왕조 순이다.[4] Ṭughlāq. 투글러크, 투글루크로도 불린다. 본문에서는 투글루크로 서술.[5] 튀르크인, 파슈툰족, 인도아리아인[6] 제국의 공식 국교였다.[7] 주 지배층이 개종한 무슬림 노예들인 맘루크 출신이었기에 노예 왕조라고 부른다. 종종 '맘루크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 인도 맘루크 왕조, 보통 노예 왕조라고 부른다.[8] 이슬람권에서 '가지'는 지하드를 치르는 성전사, 장군들을 부르는 칭호이다. 가지 말리크는 즉위 이후 이름을 기야스 알 딘 투글루크로 개명했기에 그가 세운 왕조를 투글루크 왕조라고 부른다.[9] '사이이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들을 일컫는 칭호로, 초대 술탄인 키즈르 칸이 사이이드를 자칭하면서 사이이드 왕조라는 이름이 붙었다.[10] 중간에 무굴 제국을 쫓아내어 들어섰다가 무굴의 반격으로 망한 아프간계 수르 왕조를 델리 술탄국의 계통에 포함시키는 분류도 있다.[11] 북인도의 첫 이슬람 왕조. 한때 강력한 군사력으로 북인도를 호령했지만 초대 술탄 마흐무드 사후 급격히 쇠퇴한다. 호라산 지역은 셀주크 제국에게 넘어갔고, 인도 지역은 후술할 고르 왕조에게 그대로 넘어갔다.[12]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일대.[13] 학계에서는 '맘루크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보통 노예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14] 참고로 라지아 술타나는 이슬람권에서 정말 보기 드문 여성 군주였다. 1236년부터 1240년까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15]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라지아 술타나는 남편과 함께 남아있는 군대를 데리고 카이탈 지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병사들은 라지아 술타나를 버렸고, 결국 1240년 10월 14일에 강도를 당해 살해되었다.[16] 짙은 초록색 영토는 직할령, 연두색 영토는 봉신국.[17]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이주해 대대로 뿌리를 박고 살았던 튀르크계 민족.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토착 파슈툰족과 통혼하여 피가 많이 섞였던 혼혈이었고, 때문에 노예 왕조의 주류를 이루던 튀르크계 귀족들은 할지족을 튀르크인으로 영 인정하지 않았다.[18] 잘랄웃딘은 델리에 입성하고 왕궁에 들어간 이후,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며 상징적인 의미로 왕좌에 앉기를 거부하는 등 여러 퍼포먼스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겸손함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19] 참고로 잘랄웃딘은 말리크를 처형했으나 반란에 동참한 나머지 세력들을 관대하게 처리했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반란 지도부를 일부러 연회에 초대하기도 했을 정도.[20] 잘랄웃딘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알라웃딘을 데려와 키우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라웃딘의 결혼생활은 영 좋지 않았고, 알라웃딘은 하루빨리 잘랄웃딘의 영향력에 벗어날 생각에 빠졌다.[21] 알라웃딘은 이미 아와드 총독으로 재임할 때부터 잘랄웃딘을 살해할 생각이었다. 알라웃딘은 남쪽의 부유한 야다바 왕조의 수도인 데바기리를 침략, 막대한 양의 재물을 약탈했다. 알라웃딘의 전과에 기뻐한 잘랄웃딘은 친히 알라웃딘을 치하하기 위해 수행원 몇만 데리고 알라웃딘의 본진으로 향했다. 알라웃딘은 잘랄웃딘이 방심한 틈을 노려 그를 베고 수행원과 보좌 신하들을 모두 죽였다.[22] 알라웃딘의 능력 중심의 인사 덕분에 이미 노예 왕조 시절 주류를 차지하던 튀르크계 귀족들은 완전히 밀려났고, 그 자리에 토착 인도계 귀족들이 등장하면서 할지 왕조는 옛 노예 왕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하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23] 사실 이들 중 상당수는 1292년에 북인도를 침입했다가 항복하여 델리에 살고 있었던 몽골 병사들이었다. 이 몽골 병사 3,000명은 전리품을 적게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129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델리 술탄국의 군대에 의해 나흘 만에 진압되었다. 또한 이 반란에 분노한 알라웃딘은 몽골인 반란군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아서 아이들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찢어 죽였고, 아내들은 병사들한테 강간하게 한 다음 사창가로 보내버리는 잔혹한 처벌을 행했다. 이후 인도에는 가장의 반역이나 항명으로 가족들을 살해하는 연좌제 풍습이 자리잡게 되었다.[24] 이때 카카티야 왕조의 왕이 항복의 의미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단결정인 코이누르를 알라웃딘에게 바쳤다고 추정된다.[25] 한편 판디아 왕국 정복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 출신 신하들이 판디아와 결탁하여 알라웃딘을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안그래도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몽골계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던 알라웃딘은 당연히 이에 격분했고, 결국 델리에 거주하던 30,000명 정도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26] 이슬람에서는 술을 금지하지만 인간 본성상 술과 알코올을 원천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당시 델리 술탄국에서는 술이 넘쳐났다. 심지어 알라웃딘 본인도 엄청난 애주가였다(...).[27] 기야스의 죽음에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다. 아버지가 자신 외에 다른 아들을 더 총애하여 그에게 술탄직을 물려줄 것 같으니 일부러 기반을 제대로 쌓지 않은 건물에 아버지를 초대, 사고사로 위장해서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다.[28] '데바기리'라고도 한다. 현재의 마하라슈트라 주의 도시.[29] 참고로 당시 델리의 귀족들은 수도를 옮기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도를 옮기고 난 이후 델리는 예전만큼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델리의 귀족과 엘리트층들의 권력은 크게 약해졌다.[30] 무함마드는 남인도 뿐만 아니라 망해가는 차가타이 칸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지방에도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군대 보급 실패와 원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돌아온다.[31] 다만 이 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32] 이 당시 인도의 고문 수법은 대단히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뼈를 부러뜨리거나 손발톱 밑에 못을 박는 것은 예사요, 톱으로 사람을 산채로 썰거나 눈을 뽑고 목구멍에 녹인 납을 부어넣은 사례도 많았다.[33] 바흐룰 로디의 할아버지인 말리크 바흐람 칸 로디는 사이이드 왕조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펀자브의 지배자가 되었다.[34] 참고로 알람 샤는 델리 교외로 내려가 1478년 7월까지 꽤나 오랜 세월 동안 살다가 평안하게 죽었다.[35] 참고로 시칸다르 샤는 직접 당대 델리 술탄국 및 동부 이슬람권의 공용어 페르시아어로 시를 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굴루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36] 가끔 수르 왕조를 델리 술탄국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로디 왕조를 몰아낸 무굴 제국을 일시 축출하고 세워진 셰르 샤 수르의 단명한 인도 아프간계 왕조로, 세르 샤 사후 죽지도 않고 다시 돌아온 무굴 제국에게 멸망한다. 간혹 델리 술탄조의 한 왕조로 취급한다. 자세한건 수르 왕조 참조.[37] 그 유명한 중국인 상인들도 인도 상인들 상대로 당해내지 못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38] 특히 결혼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회적인 교류가 영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슬림은 피지배자 힌두교도를 다신교도 불신자로써 백안시했고,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를 혐오하며 정복자 무슬림들을 전통 카스트에서 수드라 취급했으니 교류 자체가 영 이루어질 리가 없다. 근현대에도 이 종교들간의 분쟁은 정말 엄청났었는데 하물며 그 옛날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