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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15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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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사마르칸트 (1370년~1405년) 헤라트 (1405년~15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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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아미르, 술탄 | |||||||
주요 군주 | 티무르 (1370년~1405년) 샤 루흐 (1405년~1447년) 울루그 베그 (1447년~1449년) 아부 사이드 미르자 (1451년~1469년) 후세인 바이카라 (1469년~1506년) | }}}}}}}}}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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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말까지 중앙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계승한 국가이다. 지배층은 서부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바를라스, 잘라이르, 술두스, 아를라트, 카라우나스 등과 같은 몽골계 부족민들이었으며, 당대에는 스스로를 차가타이 칸국이라고 불렀다. 정치 · 군사적 측면에서도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층과 기마 군단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에 집단명도 변하지 않고 '차가다이인'이라 불렸다. 그럼에도 별개의 국가로 인식되는 이유는, 권력의 중심이 보르지긴씨족 내에서 칭기즈 칸의 직계인 키야트에서 방계인 바를라스 부족으로 정권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건국자는 몽골 제국의 귀족 계층인 보르지긴씨족 바를라스부 출신의 티무르이다. 티무르는 당시 분열된 몽골 제국 국가들 간 끝임없이 벌어지는 내전 상황에서 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재통합하며 당대 차가타이 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시켰다. 티무르 제국은 멸망 이후 인도[6]의 무굴 제국으로 계승된다.
2. 국호
Turannıŋ sultānı Timurbäg üç yuz miŋ çärig bilä Islām üçün Toqtamışqan bulğar qanıqa yurıdı
투란의 술탄 테뮈르 벡이 이슬람을 위해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르의 칸인 톡타므쉬 칸에 맞서 북쪽으로 올라왔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카르삭페이 비문 (차가타이어)
투란의 술탄 테뮈르 벡이 이슬람을 위해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르의 칸인 톡타므쉬 칸에 맞서 북쪽으로 올라왔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카르삭페이 비문 (차가타이어)
티무르 시대의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공식적인 국호는 이란과 투란(ایران و توران)이다.[7] 이는 페르시아-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스텝 유목제국인 튀르크 및 몽골을 모두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아랍어 지명인 마와라안나흐르(ما وراء النهر) 역시 자주 사용되었다.
시아파 역사가들은 티무르 제국을 구르카니(گورکانیان)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몽골어로 '사위'를 뜻하는 구르겐[8]에서 유래한 것으로 티무르 자신이 황금씨족의 혈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칸을 칭할 수 없자 대신 칭한 것이다.
3. 역사
4. 문화
3개의 마드라사로 둘러싸인 일종의 문화 광장인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티무르 및 사파비 왕조 양식 건물에서 자주 보이는, 태양을 이고 있는 호랑이 문양.
후세인 바이카라 시기의 궁정 화가 카말웃딘 비흐자드의 그림 (17세기 무굴 제국 모사본)
티무르 제국의 문화 (한국어 위키백과)
이전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번영하던 이슬람 황금기가 막을 내린 이래로 이슬람 세계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가 가져온 몽골의 전통이 아랍·페르시아의 이슬람 문화와 혼합되면서,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티무르 제국 치하의 동부 이슬람 세계는 다시금 시작된 문화적 번영기를 맞이한다. 학자들은 이를 유럽의 르네상스와 비견된다고 하여 일명 티무르 르네상스(Timurid Renaissance)라고 한다. 티무르 르네상스는 몽골의 침략과 정복이 끝나가던 15세기 즈음에 절정에 달했다.
티무르 시대부터 시작된 문화적 번영은 그 뒤를 이은 샤 루흐와 황후 가우햐르 샤드[9],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울루그 베그[10],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11] 치세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고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대규모 건축사업 또한 진행되어 여러 영모, 마드라사, 모스크, 키타바네[12]가 건설되었다. 또한 대수학, 연산학, 구전 문학, 세밀화 예술, 금속공예, 건축, 천문학에 대한 연구와 발전도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16세기 초에는 화약무기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헤라트는 이슬람 세계에서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가볼만한' 중심지가 되었고, 이전 몽골의 침공 때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나 다시 재건된 사마르칸트는 학술 연구의 중심지이자 티무르 르네상스의 총본산으로 거듭났다. 이 두 도시들은 모두 동부 이슬람 세계를 넘어 동시대 이슬람권의 여타 다른 도시들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이슬람 문화의 선구자로서 번성하였다. 한편으로 티무르 르네상스는 이전 부와이흐 왕조의 문예 발전[13]과는 구분된다는 점이 독특하며, 고전 페르시아 문화의 직접적인 부흥이라기보다는,구어체를 포함한 페르시아 문학을 발전시켜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는다.[14]
4.1. 발전상
티무르는 수많은 정복지에 파괴와 약탈 그리고 살육을 일삼았음에도, 그 지역의 도시들에 있는 장인이나 예술가, 과학자, 문학자들은 죽이지 않고 수도 사마르칸트로 이주시켰다.14세기 후반~15세기 초에 티무르 제국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래로, 많은 페르시아의 예술과 문화들이 티무르가 가져온 몽골 전통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티무르 통치 말기에 샤리아[15]법이 제정되면서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위대한 건축의 도시로 만들고자 하여 여러 건축가들에게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것을 명했는데, 그 결과물이 오늘날에도 당당하게 남아 위용을 뽐내고 있는 비비 하늠 모스크, 샤히 진다 영묘, 구르 에 아미르 등이다. 한편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부활을 제창했던 만큼 유목민적인 전통에도 관심이 많았어서, 도시 건축과 초원 생활을 결합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한가지 명안(?)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 내에 드넓은 정원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바기 치나르(작은 나무의 정원), 바기 딜구샤(매혹의 정원), 바기 비히슈트(천국의 정원), 바기 볼란드(장려한 장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원들은 여러 개의 문이 달린 담장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으며, 그 안에는 화려하고 장대한 천막과 잠시 쉴 수 있는 전각들이 세워졌다.
1404년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학자 클라비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사마르칸트는 대략 15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튀르크인·아랍인·무어인·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16]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방문한 각각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러시아·타타르 지방의 가죽과 린넨, 키타이[17] 지방의 비단과 사향, 인도 지방의 육두구, 정향, 시나몬 등 각종 특산물들이 넘쳐나는 국제도시였다고 한다.
건축에 대한 티무르의 각별한 관심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티무르 사후에 집권한 샤 루흐의 궁정을 방문한 중국 사신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군주는 성(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거주하는데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집은 사각형 모양이며 고대(高台)와 같이 당당하다. 서까래나 기와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가운데에는 텅 빈 방이 수십 칸이나 있다. 담장이나 창 등은 그림과 금벽(金碧)으로 장식했고, 유리문의 턱에는 꽃 모양을 조각하고 골각(骨角)을 박아 넣었으며, 바닥에는 융단을 깔았다.
피르다우시의 작품 유수프와 줄라이하(Yusuf and Zulaikha)를 묘사한 페르시아식 세밀화. 《쿠란》에 따르면 아름다운 청년 유수프는 만나는 모든 여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수프를 사랑한 줄라이하는 함정을 파서 그와 맺어지려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비흐자드 작. 1488년, 헤라트. 카이로 이집트국립박물관 소장. |
15세기 중반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는 더 남쪽의 헤라트가 되었고, 그곳 역시 티무르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마르칸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배경 출신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장인과 지식인들은 곧 헤라트가 당대 이슬람 세계의 예술·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 표현 중 상당 부분이 다른 문화적 표현 전통과 혼합된 뒤에 급속하게 발전하기도 했다.
티무르 왕조의 문화는 역설적으로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15세기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9년부터 1506년까지 반세기 가까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전쟁과 파괴의 혼란을 피해 수많은 학자·문인·예술가들이 모여들였기 때문이었다. 헤라트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 제국의 시대 전부를 통틀어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로 화려한 문화는 그렇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18] 당대의 재상이자 차가타이 문학의 완성자인 알리셰르 나보이는 「파르하드와 시린」, 「레일리와 마즈눈」 등 많은 시집을 남겼으며, 신비주의 시인으로 이름난 압드 알 라흐만 자미는 낙쉬반디 교단의 장로인 호자 아흐라르의 전기를 집필했다. 이외에도 바이카라의 궁정에서는 하피지 아브루, 압드 알 라자크 사마르칸디, 미르혼드, 크완다미르 등 수많은 역사가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이 남긴 역사서들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이 밖에 당대 최고 화가였던 비흐자드, 서예가 마쉬하디 등도 이 시기를 빛낸 대표적인 예술가들이다.
5. 역대 군주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0000 0%, #000000 25%, #000000 80%, #000000); color: #CA00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티무르는 1370년부터 1402년까지 수르가트미시 칸과 술탄 마흐무드 칸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차가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지만, 혈통 문제로 인해 티무르 본인은 칸을 칭하지 못하고 이슬람식 칭호인 아미르를 자칭했다.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티무르가 권력을 잡은 1370년이 아니라 차가타이 칸국이 멸망한 1402년에 티무르 제국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고도 한다. | |||||||||||
작위 | 휘 | 치세 | ||||||||||
아미르 | 티무르 벡 구르카니 تیمور بیگ گورکانی 절름발이 티무르 تیمور لنگ | 1370년 ~ 1405년 | ||||||||||
아미르 | 피르 무함마드 پیر محمد بن جہانگیر میرزا | 1405년 ~ 1407년 | ||||||||||
아미르 | 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 خلیل سلطان بن میران شاہ | 1407년 ~ 1409년 | ||||||||||
아미르 | 샤 루흐 미르자 شاھرخ میرزا | 1405년 ~ 1447년 | ||||||||||
아미르 |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شاھرخ میرزا 위대한 베그 الغ بیگ | 1447년 ~ 1449년 | ||||||||||
제국 1차 분열 | ||||||||||||
트란스옥시아나 | 헤라트 | 호라산 이라키 아잠 파르스 | ||||||||||
사마르칸트 | 부하라 | 히사르 | 페르가나 | 발흐 | 카불 | |||||||
압둘라티프 미르자 میرزا عبداللطیف 부친살해자 پدر کش (1449년 ~ 1450년) | 알라 웃 다울라 빈 바이순쿠르 علاء الدولہ میرزا بن بایسنقر (불명) | |||||||||||
아불 카심 바부르 미르자 ابوالقاسم بابر میرزا بن بایسنقر بیگ (1449년 ~ 1457년) | 술탄 무함마드 سلطان محمد ابن بایسنقر (1447년 ~ 1451년) | |||||||||||
압달라 미르자 میرزا عبد اللہ (1450년 ~ 1451년) | ↓ 아불 카심 바부르 미르자 ابوالقاسم بابر میرزا بن بایسنقر بیگ (1449년 ~ 1457년) | |||||||||||
(공석) | 미르자 샤 마흐무드 میرزا شاہ محمود (1457년) | |||||||||||
술탄 이브라힘 ابراھیم میرزا (1457년 ~ 1459년) | ||||||||||||
아부 사이드 미르자 ابو سعید میرزا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족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의 도움을 받아 분열되어 있던 제국을 재통일했지만,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은 흑양 왕조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러나 얼마 뒤 그가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티무르 제국은 다시금 분열되었다. (1451년 ~ 1469년) | ||||||||||||
제국 2차 분열 | ||||||||||||
트란스옥시아나 | 호라산 | |||||||||||
사마르칸트 | 부하라 | 히사르 | 페르가나 | 발흐 | 카불 | 헤라트 | ||||||
술탄 아흐마드 미르자 سلطان احمد میرزا (1469년 ~ 1494년) |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2세 عمر شیخ میرزا ثانی (1469년 ~ 1494년) |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 سلطان محمود میرزا (1469년 ~ 1495년) | 울루그 베그 미르자 2세 میرزا الغ بیگ (1469년 ~ 1502년) |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미르자 سلطان حسین میرزا بایقرا (1469년, 1차 재위) | ||||||||
술탄 바이순쿠르 미르자 빈 마흐무드 미르자 بایسنقر میرزا بن محمود میرزا (1495년 ~ 1497년) | 술탄 알리 이븐 마흐무드 미르자 سلطان علی بن محمود میرزا (1495년 ~ 1500년) | 술탄 마수드 미르자 빈 마흐무드 미르자 سلطان مسعود بن محمود میرزا (1495년 ~ ?) |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 ظہیر الدین محمد بابر (1494년 ~ 1497년) | 쿠스라우 샤 خسرو شاہ (찬탈자) ? ~ 1504년 | 무킴 베그 아르군 مقیم ارغون (찬탈자) ? ~ 1504년 | ↓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 میرزا یادگار محمد (1470년, 6주 재위) | ||||||
무함마드 샤이바니 휘하의 우즈베크족에게 함락당함 (1500년 ~ 1501년) | 자한기르 미르자 2세 جہانگیر میرزا (술탄 아흐메드 탐볼의 꼭두각시) (1497년 ~ 1503년) | ↓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 ظہیر الدین محمد بابر (1504년) | ↓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미르자 سلطان حسین میرزا بایقرا (1470년 ~ 1506년, 2차 재위) | |||||||||
무함마드 샤이바니 휘하의 우즈베크족에게 함락당함 (1503년 ~ 1504년) |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 ظہیر الدین محمد بابر (1504년 ~ 1511년) | 바디 알자만 미르자 بدیع الزمان میرزا (1506년 ~ 1507년) |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 مظفر حسین میرزا (1506년 ~ 1507년) | |||||||||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 ظہیر الدین محمد بابر 바부르는 그의 조부였던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그랬듯 페르시아 샤 이스마일 1세의 도움을 받아 티무르조의 중심지인 중앙아시아를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이때 바부르의 통치 지역은 카스피해에서 우랄산맥 남안에 다다랐으며, 산하 도시로 카불, 가즈니, 쿤두즈, 히사르,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 타슈켄트, 사이람이 있었다. (그가 인도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이 시기가 바부르 생애에서 가장 영토가 넓었다) (1511년 ~ 1512년) |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헤라트를 정복하면서 헤라트 티무르조 멸망 (1507년) | |||||||||||
우바이둘라 칸 휘하의 우즈베크족이 사마르칸트를 정복하면서 트란스옥시아나 티무르조 멸망 (1512년) | 자히르 웃딘 무함마드 바부르 <ہیر الدین محمد بابر | ↓ 이스마일 1세 شاه اسماعیل یکم (1510년 ~ 1524년, 사파비 제국의 초대 샤한샤) | ||||||||||
우즈베크인들이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세우면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그 이후인 1526년,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면서 티무르조 인도 제국인 무굴 제국을 건국하여 그곳에서 명맥을 이어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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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작물에서
토탈 워: 미디블2에선 기본적으론 플레이 불가능한 팩션으로 등장(올팩션 모드로 플레이 가능하고 커스텀 배틀에선 기본적으로 플레이 가능). 그야말로 악몽같은 기세로 유럽에 쳐들어온다. 특히 투르크로 플레이할 경우 제대로 직격탄을 맞게 되는 악몽의 존재. 몽골은 운 좋으면 러시아에서 등장할 수도 있지만 티무르는 무조건 아나톨리아와 중동 지역을 공격한다.대항해시대 3에서는 1480년을 시작 시점으로 하고 있어, 이스파한, 바드다드 등 주된 세력권 도시가 티무르제국의 도시로 등장한다. 육상 탐험이 가능한 시리즈 특성상 실크로드의 주된 거점이 된 티무르 제국의 주요 거점도시들도 거의 대부분 등장한다.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4에서는 쇠퇴한 몽골계 세력 대신 주인공 세력으로 나온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게임 시작시점이 1337년이 끝이기에 처음부터 플레이할 수 없다. 1350년 이후 이벤트로 나타나서 티무르가 영주로 있는 땅이 생기면 play 콘솔이나 세이브 파일에서 티무르를 선택해서 플레이하면 된다. 티무르는 1350~1370년 기간 사이에 랜덤하게 등장하며 등장 후 9년이 지나면 최소 3천 최대 6만의 둠스택을 가지고 호라산, 히바, 메르브 중 하나에 전쟁을 걸고 1370년 이후 계승자는 이벤트로 최대 3만 5천의 둠스택을 얻으며 75의 퇴폐도를 깎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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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물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서는 토목의 변 당시 조선군이 오이라트군을 격파하고 영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티무르 제국의 사신단을 구출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그들이 조선을 방문해 미당 독점 교역권을 따내고 조선이 사신으로 보낸 신숙주가 울루그 베그가 맏아들의 쿠데타로 밀려나는 것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면서 점점 관계가 깊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조선과 형제국이 되었고 다마스쿠스강 재련 기술과 새 가축종과 곡물종자를 전달해 주었으며 그 뒤로도 조선의 서역 원정에서 병력 1만과 대부분의 물자를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원정이 끝나면서 동유럽 연합에게 받은 배상금 절반을 배당받고 새 무역 창구도 열리는 등 대체역사의 최대 수혜국이 되고 있다. 외전에서는 울루그 베그의 정책으로 이슬람 법을 완화시켜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도를 낮추어 외부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후신으로 인식될 정도로 번영 중이라고 언급되며 현대 시점에 와서도 파르스 이슬람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근육조선에선 조선이 오스만과 전쟁을 벌일 때 조선을 지원했고 1부주인공이 타던 한혈마 흑우도 티무르 제국으로 보내져 말년을 보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에서 티무르 제국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 문명은 타타르. 오스만 술탄국의 바예지드 1세와의 싸움인 앙카라 전투까지 다루고 있다.
위의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 외에서도 킹방원 메이커, 킬방원 동생이 되었다 등에서 나비효과의 일환으로 명나라 원정을 진행하는 역할로 등장하기도 하며 현재 몽골 사용 설명서의 작가 두눈뜬왕의 신작 티무르 사용 설명서에서 아예 배경이 되기도 했다.
[1] 1375년 경 발행된 세계지도 '카탈란 아틀라스'에 등장하는 티무르 제국의 국기. #[2] 위키미디어 공용[3] 지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루크 왕조까지 티무르 제국의 영향권으로 그려놓았는데, 물론 맘루크 왕조가 14세기 후반에 티무르에게 털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티무르 제국에게 복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도를 볼때 맘루크를 제외하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4] 티무르 제국의 지배층이 페르시아화한 튀르크-몽골 계통이었던 만큼 페르시아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티무르가 정복한 이전 이란의 잔존 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5] 제국의 공식 국교였다.[6] 정확하게는 현재의 인도 공화국 +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7] 이란은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문화권을 가리키는 명칭이고(3세기 사산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낙쉐로스탐 비문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투란은 중앙아시아 일대를 가리키는 역사적 명칭이다. 투르키스탄이라고도 한다.[8] 쿠르겐, 귀르겐, 큐레겐이라고도 한다.[9] 당시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헤라트는 문화적·경제적 중심지로서 유럽 르네상스의 피렌체를 훨씬 뛰어넘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번영이 너무 눈부신 나머지 '호라산의 진주'라는 별칭까지 붙을 정도였다.[10] 그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무슬림 박식가 및 학자들이 사마르칸트에서 각종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 유산 가운데 일부는 근대 유럽 과학자들의 업적과 동등하거나 아예 웃도는 수준이었다.[11] 그의 치세에 헤라트에서는 수많은 교육 시설들이 건립되었고, 전란을 피하여 이주해온 많은 학자들이 궁정에 고용되어 학문의 발전을 이루어냈다.[12] 쉽게 말하자면 도서관이다.[13] 일명 이란의 막간(Iran intermazo)[14] 부와이흐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를 되살리고 고전적인 문체를 강조했다. 반면에 티무르 르네상스는 페르시아어 문학에서는 구어체를 더욱 선호했지만 지배층 내에서 주로 사용되던 튀르크어가 행정어이자 문어로 더욱 강조되었다. 시각적인 예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진화가 있었다. 티무르 제국의 건축양식은 과거 페르시아의 것에서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더욱 화려해지고 거대하게 지어졌다. 세밀화는 페르시아 세밀화 양식에 중앙유라시아의 호쾌한 기풍과 중국식 화풍이 더해진 양식이 유행했다. 티무르 제국의 화가들은 당시 유럽의 르네상스 화가들과 달리 인체를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그림에 반영하는데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15] 이슬람의 전통 율법.[16] 아르메니아인들은 중근세 시대에 아랍인, 페르시아인들과 함께 상인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명성높았다.[17] 북중국을 가리킨다. 원나라 시대에는 북중국을 '키타이', 남중국을 '만지'라고 불렀다.[18] 티무르 제국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훌레구 울루스(일 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라시드 앗 딘 등의 이란 역사, 기록, 문학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