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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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등처행중서성 | 甘肅等處行中書省
1. 개요
감숙등처행중서성, 줄여서 감숙행성 또는 감숙성은 원나라의 행정구역이다. 영역이 변한 채 현존하는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다.2. 역사
중통 2년~지원 10년(1261~1273), 지원 18년~22년(1281~1285) 두 차례 중흥(中興)에 행성이 설치됐다가 다시 폐지됐다. 두 번째로 폐지됐을 때 선위사가 대신 설치됐다. 지원 23년(1286) 중흥성이 감주(甘州)로 옮겨 설치된 뒤에 비로소 감숙행성이 세워졌다. 지원 31년(1294) 영하(寧夏)를 분성했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3. 행정구역
3.1. 감주로(甘州路)
당에서 감주, 또는 장액군(張掖郡)이라고 불렸다. 송나라 때는 서하가 이곳을 지배했으며 이름을 진이군(鎮夷郡)이라 고치고, 선화부(宣化府)를 세웠다. 쿠빌라이 칸 때인 지원 원년(1262) 감숙로총관부(甘肅路總管府)를 세웠다. 지원 8년(1271) 이름을 감주로총관부(甘州路總管府)로 바꿨고, 18년(1281) 행성의 2차 설치 이래 하서 회랑의 여러 군(郡)을 공제(控制)했다.3.2. 영창로(永昌路)
당에서는 양주(凉州), 송에서는 서량부(西凉府)였다. 송 경덕 연간(1004~1007)부터 서하가 지배했다. 몽골 제국 지배하에 들어온 뒤로는 서량부로 불렀으나 지원 15년(1278) 영창왕 지빅테무르(只必帖木兒)[1]의 궁전이 있다고 해서 영창로를 새로 세우고는 서량부를 주(州)로 격하한 뒤 예속시켰다.- 서량주(西凉州)
3.3. 숙주로(肅州路)
당에서 숙주, 또는 주천군(酒泉郡)이라고 불렸다. 서하의 근거지였다. 칭기즈 칸이 재위 21년째 되는 해 이곳을 정벌하다 낙마 사고를 당했다. 지원 7년(1270) 숙주로총관부를 설치했다.3.4. 사주로(沙州路)
당에서 사주, 또는 돈황군(燉煌郡)이라고 불렸다. 송에서도 사주라고 불렀는데, 경우 연간(1034~1038)부터 서하가 과주(瓜州), 사주, 숙주 세 주를 점거했다. 칭기즈 칸이 점령한 뒤에는 팔도(都)를 분봉했다. 지원 14년(1276) 쿠빌라이 칸이 다시 주(州)를 설치했고, 17년(1279) 사주로총관부로 승격하고 과주를 예속시켰다.- 과주(瓜州)
3.5. 역집내로(亦集乃路)
감주의 동북쪽에 있는 큰 연못인 거연해(居延海)가 있는 곳으로, 한나라 때 서해군(西海郡) 거연고성(居延故城)이 있었다. 서하에서는 이곳에 위복군(威福軍)을 뒀다. 이름 '역집내'는 서하어를 음차한 것으로 몽골어로는 '카라호토(ᠬᠠᠷᠠ ᠬᠣᠲᠠ)', 한자로는 흑수성(黒水城)이라고도 표현한다. 칭기즈 칸 21년에 몽골에 귀부했으며 서하인들이 이곳에 거주지를 이뤘다. 지원 23년(1286) 총관부를 세웠다.3.6. 영하부로(寧夏府路)
당에서 영하는 영주에 속했는데, 송에서는 폐지하고 대신 진(鎭)을 세워 번부(蕃部)를 속하게 했다. 당 말 탁발사공이 하주에 거점을 둔 이래 은주(銀州), 하주(夏州), 수주(綏州) 유주(宥州), 정주(靜州) 다섯 주가 있었다. 탁발사공의 후손 이덕명이 흥주를 거점으로 일어났으며 후일 중흥부로 이름을 고쳤다. 지원 25년(1288) 총관부를 세웠다.- 영주(靈州): 당에서는 영무군(靈武郡)이라고도 불렀으며, 서하는 상경군(翔慶軍)으로 개칭했다.
- 명사주(鳴沙州): 수에서 설치한 환주(環州) 명사현(鳴沙縣)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응리주(應理州): 난주(蘭州)와 접경했으며 동쪽은 황허로 막혔다. 중국의 지리지에는 당 영무군의 옛 땅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주성(州城)이 건립된 연도는 미상.
3.7. 산단주(山丹州)
당에서는 산단현(刪丹縣)으로 감주의 속현이었다. 서하가 이곳에 감숙군(甘肅軍)을 뒀다. 몽골의 지배에 놓인 뒤 아지키대왕(阿只吉大王)[2]이 분봉받아 다스렸다. 지원 6년(1269) 행산단성사(行山丹城事)부터 刪이 山으로 와전됐다. 지원 22년(1285) 현에서 주로 승격됐고 감숙행성에 예속됐다. 어느 총관부에 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감주에 속했던 점을 근거로 감숙로에 편입됐을 것으로 추측할 여지가 있다.3.8. 서녕주(西寧州)
당에서 선주(鄯州)를 세웠고 황수현(湟水縣)을 다스렸는데, 상원 연간(674~676)에 토번에 빼앗겼고 청당성(青唐城)이라 불렀다. 송에서 서녕주로 고쳐 불렀다. 몽골 제국 초에는 부마 창길의 분봉지였다. 지원 23년(1286) 서녕등처구각과정소(寧州等處拘搉課程所)를 세웠고, 창길이 영복군왕(寧濮郡王)이 되면서 그 땅을 지켰다.3.9. 올랄해로(兀剌海路)
칭기즈 칸이 재위 4년차인 1209년에 흑수성(역집내) 북쪽에 있는 올랄해성 서쪽 관문으로 들어가 서하 장수를 사로잡았고, 올랄해성 전투에서 이겼다.[1] 오고타이 칸의 손자로, 화북 지역을 분봉받아 통치한 쿠텐의 아들이다.[2] 차가타이의 장남 무에투겐(木阿秃干)의 손자로, 부리(不里)의 아들이다.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카라훌레구의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