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9 08:14:56

왕감(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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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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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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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王鑒
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로 자는 무고(茂高). 서주 임회군(臨淮郡) 당읍현(堂邑縣) 출신. 부친 왕준(王濬)은 서진 시기에 어사중승을 지냈다.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문필로 이름을 날렸고, 이후 낭야왕 사마예의 부름에 응해 낭야국 시랑이 되었다. 당시 두도가 난을 일으키면서 강주(江州)와 상주(湘州)가 피폐해졌고, 왕돈의 토벌군은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왕감이 사마예에게 친정에 나설 것을 상주하니, 사마예는 그의 상소를 깊이 받아들이고 즉시 출정 준비를 명했다. 하지만 주부 웅원의 반대로 친정은 지연되면서 사마예가 미처 출진하기도 전에 왕돈, 도간 등이 난을 진압했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사마예가 황제에 즉위하자 왕감을 부마도위, 봉조청, 영흥현령으로 삼았다. 대장군 왕돈이 그를 불러 기실참군으로 쓰려 했지만 왕감은 이에 응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1세.

왕감의 후손들은 그의 문학 작품들을 모아 《왕감집》(王鑒集) 5권으로 엮었으며, 이 중 유명작으로는 〈칠석관직녀〉(七夕觀織女)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