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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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何準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유도(幼道). 양주 여강군(廬江郡) 잠현(灊縣) 출신. 안풍태수 하예(何睿)의 아들. 표기장군 하충의 동생. 목장황후 하법예, 남강태수 하담(何惔), 상서좌복야 하징의 아버지.
2. 생애
하준은 고상하고 욕심이 적어 약관의 나이로 명성을 얻었고, 여러 주(州)의 관청에서 서로 데려가기 위해 초빙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형 하충이 하준에게 벼슬을 권유하니, 하준이 말했다."이 다섯째의 이름으로 어찌 표기장군을 멸할 수 있겠습니까?"
하준은 하충의 다섯번째 동생이므로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형 하충은 재상의 중책을 맡았으나, 하준은 형과 달리 은둔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조정에서는 하준을 불러 산기랑으로 삼으려 했지만, 하준은 사양하고 그저 불경만 외우며 탑과 절을 수리하는 일에 전념할 뿐이었다. 하충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아들이 셋이었던 하준은 첫째 하방(何放)을 형의 자식으로 입적시켜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후 하준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금자광록대부로 추증되고, 진릉현후(晉興縣侯)로 추봉되었다. 그러나 하준의 후사를 이은 하담은 본디 아버지를 닮아 고결한 행실이 있어 조정에서 아버지에게 내린 작위을 사양하고 받들지 않았다.
아들 하담은 관직에 올라 남강태수에 이르렀으나 요절하였고, 하담의 장남 하원도(何元度)는 서양태수, 차남 하숙도(何叔度)는 태상경, 상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