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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刁協(? ~ 322)
중국 동진의 인물로 자는 현량(玄亮). 기주 발해군(渤海郡) 요안현(饒安縣) 출신으로, 조부 조공(刁恭)은 위나라에서 제군태수를 지냈고, 아버지 조유(刁攸)는 서진 무제 시절 어사중승을 지냈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경전을 가까이 했고 암기하는 능력이 뛰어나 널리 보고 들은 것을 잘 기억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관직에 진출해 복양왕(濮陽王) 밑에서 문학을 지내다가 태상 휘하의 박사로 옮겨졌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발해군 대중정으로 근무했다.팔왕의 난이 발발하자 성도왕 사마영의 부름을 받고 그의 평북사마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팔왕의 난이 복잡하게 전개됨에 따라 조협은 조왕 사마륜에게 붙어 상국참군에 임명되었고, 사마륜이 토벌당한 후에는 장사왕 사마예에게 붙어 표기사마에 임명되었다. 팔왕의 난이 막바지에 들어갈 무렵, 병주자사 동영공 사마등(司馬騰)이 임장(臨漳)에 주둔하자 그의 휘하로 들어가 장사(長史)가 되었고, 얼마 후 영천태수로 옮겨졌다.
영가 원년(307년), 하남윤에 임명되었으나 거부하고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도주했다. 당시 강동 건강에 자리를 잡은 진동장군 낭야왕 사마예는 영가의 난을 피해 도망쳐온 인재들을 널리 모집하고 있었다. 사마예는 조협을 진동군자좨주로 삼았다가 진동장사로 옮겼다. 민제가 조협을 징소해 어사중승으로 삼았지만 이미 사마예를 섬기기로 마음 먹은 조협은 따르지 않았다.
건흥 원년(313년) 4월, 낭야왕 사마예는 주처의 아들인 오흥태수 주기(周玘)가 오나라 유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몹시 꺼렸다. 사마예가 강동의 토착세력을 견제하고 중원에서 도망쳐온 이들을 채워넣으니, 예전부터 강동에 거주하던 오(吳) 땅의 사람들은 심히 원망했다. 여기에 더해 주기가 태수직에서 파면되고 조협에게 조롱을 받게 되니, 주기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기고 내란을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면서 분사했다. 주기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중원에서 내려온 천박한 자들을 몰아내 자신의 복수를 해달라 부탁하고 사망했다.
건흥 원년(313년) 5월, 민제가 조서를 내려 낭야왕 사마예를 좌승상에 임명하자 조협은 승상좌장사에 임명되었다.
건흥 2년(314년) 11월, 주기의 아들 주협(周勰)이 오인(吳人)들의 불만을 이용해 왕도, 조협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자 각지의 호걸들이 주협에게 귀부했다. 오나라의 말제 손호의 일가인 손필(孫弼)이 광덕(廣德)에서 거병해 주협에게 호응했고, 오흥공조 서복(徐馥)도 무리를 모아 사마예가 임명한 오흥태수를 살해하면서 주협에게 호응했다. 그러나 주협의 숙부 종사중랑 주찰(朱札)을 비롯한 다른 주씨들은 반란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정작 종실들의 반응이 매우 부정적인 것을 보고 주협은 당황해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호응했던 반란군 무리들은 불안에 떨었다. 결국 주협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불안에 떨던 서복의 무리들은 서복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 그를 죽인 뒤, 나아가 손필의 세력까지 공격해 손필도 제거해버렸다. 주협을 따르던 무리들도 이내 흩어지면서 반란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고, 주협은 주찰 등에게 잡혔으나 주찰이 간청한 덕에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마예라도 강동의 명망높은 호족인 주씨 집안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은 부담스러웠기에, 주찰을 오흥태수로 삼고 주협을 보듬어주는 것으로 반란 사건을 덮었다.
건무 원년(317년) 4월,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등극하고 종묘사직을 세워 마침내 동진을 건국하자, 조협은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당시 건국 초창기라 법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고 조정의 대신들은 의례를 알지 못했다. 평소 경전을 즐겨 읽어 제도와 의식에 능통했던 조협은 조정의 중심에 서서 각종 미흡한 부분들을 고쳐 주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사마예가 존호를 사용해 황제에 즉위했다. 조협은 동년 6월에 상서령으로 옮겨졌고 순숭이 조협을 대신해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수년 후,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상서령 직책은 그대로 유지했다.
조협은 성정이 강직하고 사나워 사람들과 자주 충돌했고, 항상 황제만을 숭상하면서 황제 이하의 호족과 관원들을 억압하는 바람에 낭야 왕씨를 포함해 많은 권세가들이 눈엣가시로 여겼다. 여기에 더해 술만 들어가면 제멋대로 굴어 공경(公卿)들을 괴롭히니 이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이런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원제 사마예를 섬기는 마음 하나 만큼은 진실되어 동진의 황권 회복에 온 힘을 다했다.
태흥 3년(320년) 5월, 원제 사마예는 정로장군 양감, 서주자사 채표에게 명을 내려 태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서감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양감이 의심하고 꺼리며 서감을 공격하지 않자 조협이 그를 탄핵하면서 진노한 원제에게 처형될 뻔했다. 다만 양감 또한 호족인지라 목숨은 구한 채 관직에서 쫓겨났고 채표가 양감의 군사까지 모두 감독하게 되었다.
태흥 4년(321년) 5월, 조협은 명문 호족들이 사적으로 부리는 동객(僮客)[1]을 모두 양민의 신분으로 회복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여, 조세와 부역 부담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호족의 세력을 견제했는데, 이는 당연히 호족들의 엄청난 공분을 샀다. 여남 주씨 가문의 주숭(周嵩)은 조협을 향해 "영행소인(佞幸小人)"[2]라며 대놓고 흉 보기까지 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유외와 조협을 토벌한다는 핑계로 거병하여 그 군대가 무호(蕪湖)에 이르렀다. 왕돈은 원제 사마예에게 상소해 조협의 죄상을 나열했다. 왕돈의 서신을 받은 사마예는 대노해 왕돈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외지에 주둔해있던 유외, 대연의 군대를 불러들여 건강을 보위하도록 했다. 유외가 돌아오자 조협은 그와 함께 입조해 낭야 왕씨를 모두 주살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예가 불허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왕돈의 반란군이 건강 인근까지 접근하자 석두성을 지키던 주찰이 성문을 열어 반란군을 맞이했다.[3] 조협, 유외, 대연 등은 원제 사마예의 명을 받들어 6군을 휘몰아 석두성을 쳤으나 왕돈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유외와 조협이 패배하고 건강성으로 돌아와 태극전 동쪽 계단에서 사마예를 알현했다. 사마예는 내려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는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면서 재빨리 피신해 목숨을 구할 것을 권했다. 이때 조협이 말했다.
"신하된 자라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 폐하를 지켜야지,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사마예가 대답했다."오늘 일이 임박하였는데 어찌 안 되겠는가!"
그리고는 사람과 말을 내어주어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게 했다. 유외는 말을 타고 처자식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후조로 망명했지만, 너무 노쇠했던 조협은 승마를 하지 못해 그의 종자들에게 모든 운전을 맡겼다. 조협이 강승(江乘)에 이르렀을 때, 그를 수행하던 종자들은 배반하여 그의 목을 베고 그 길로 왕돈에게로 가 수급을 바쳤다. 왕돈은 조협의 수급을 보관하다가 나중에 조협의 유족들에게 돌려주고 매장을 허락했다. 원제 사마예는 조협이 죽음 면치 못했다는 사실에 매우 비통해하며, 은밀히 사람을 보내 조협을 살해한 종자들을 납치하고 모두 주살해 그의 원수를 갚았다.훗날 명제가 왕돈을 평정하고 왕돈에게 살해당한 주의, 대연 등을 추시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조협은 황제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함강 연간(335 ~ 342)에 조협의 아들 조이가 상소해 부친의 관작 회복의 소를 청구했다. 유량 등의 대신들은 조협은 끝까지 남아서 원제 곁을 지키지 않았다며 조이의 청을 기각할 것을 주장했지만, 단양윤 은융(殷融), 좌광록대부 채모(蔡謨)가 나서서 조협은 건국의 기틀을 다진 공신이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황제에 대한 충성은 진심인데 대우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성제 사마연은 조협이 왕돈의 난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충성심은 본받을만 하다며 그의 원래 직책을 회복시키고 태뢰(太牢)의 예로써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