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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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謝邈(? ~ 399)
동진의 인물로 자는 무도(茂度). 명문가인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동진에서 재상을 지낸 사안의 조카이다.
2. 생애
사막은 성정이 강경하고 함부로 굴하는 일이 없었으며 이치와 식견이 상당했다. 그는 관직에 진출해 여러 차례 승진하여 시중에까지 올랐다. 한번은 효무제가 잔치를 즐긴 후 주위의 대신들에게 문조(文詔) 뿌렸는데, 사막은 문조 중 고상하지 못한 단어나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것들을 골라 불살라버렸다. 이 일은 주변 대신들에 의해 널리 퍼졌고 의논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사막의 행동을 칭송했다.태원 18년(393년), 오흥태수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사막의 처 치씨(郗氏)는 질투가 심하여 사막이 첩을 들이자 원망하면서 결별하자는 글만 남긴 채 떠났다. 하지만 사막은 자신의 문하생인 구현달(仇玄達)의 소행임을 의심하고 그를 쫓아냈다.
융안 3년(399년), 손은이 난을 일으키고 호걸(胡桀), 곡표(郜驃) 등을 보내 오흥군을 침공했다. 사막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구현달과 사막의 사촌 풍사지(馮嗣之)가 손은에게 내응하니, 반란군은 순탄하게 오흥군을 장악해 나갔다.
손은의 무리가 마침내 사막이 있는 오흥군 동천(東遷)에 이르렀다. 조카 사방명(謝方明)이 사막에게 얼른 도망갈 것을 권했으나, 사막은 듣지 않고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가 이내 사로잡혔다. 손은의 부하가 사막에게 고개를 북으로 향하라 명령하자 사막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난 천자께 죄를 짓지도 않았거늘, 어찌 북면(北面)할 수 있겠는가!"
결국 사막은 그 자리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훗날 손은이 유뢰지, 사염에게 쫓겨 다시 해도(海島)로 도망쳤을 때, 배신자 풍사지 등은 미처 그를 따라가지 못해 남겨진 잔당을 규합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이에 사방명은 사막의 문하생이었던 자들과 자신의 친구들 수백 명을 모아 풍사지의 무리를 치고, 풍사지 등을 붙잡아 참살하면서 사막의 원수를 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