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15:46:54

최홍(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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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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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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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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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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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洪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양백(良伯). 최찬의 아들, 최식의 고손. 기주 박릉군 평안현 사람.

젊어서 청려하다는 명성이 있었고 강직한 것이 움직이지 않는 물건 같아서 사람의 허물에 대해 면전에서 옳지 못한 주장을 꺾는 것을 좋아했지만 물러나서는 거론하지 않아 사람들이 존중했으며, 무제 때 어사치서가 되었다.

산기상시인 적영이 풍회를 천거했다가 반박하는 상소를 했으며, 이로 인해 적영을 면직되었고 조정에서 그를 꺼려 상서좌승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최홍에 대해 풀숲에 가시나무가 돋아 박릉에서 왔는데, 남쪽에서는 익더귀, 북쪽에서는 매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부상서로 선발되자 명확하게 살펴서 사람을 기용하고 사사로운 청탁이 없었으며, 극선을 좌승으로 천거했다가 후에 극선이 탄핵하자 원망했지만 극선이 공과 사를 구분한 공정한 처리인 것을 밝히자 부끄러워했다.

최홍은 재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주옥을 가지지 않았다. 여남왕 사마량이 공경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유리 술잔에 술을 권했지만, 최홍은 홀로 가져가지 않았다. 사마량이 그 이유룰 물으니 최홍이 대답하였다.
옥(玉)을 쥔 채 빨리 달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량은 이를 듣고는 도리에 어긋난 궤변이라 평했다.

홍농 양준이 죽자 최홍은 평소 양준, 독수사자 왕우와 어울렸다는 이유로 자리에 쫓겨났다. 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가 대사농을 지내다가 사망했으며, 아들은 최곽으로 산기시랑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