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5 01:01:46

반악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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潘岳
(? ~ 300)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안인(安仁)으로 양조의 사위.

이름인 반악보다 자의 앞글자를 따서 반안(潘安)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고[1] 전국시대의 초나라의 송옥(宋玉)과 함께 미남의 대명사로 자주 함께 불린다. 주인공이 송옥, 반안과 같은 미남이라고 불리는 장면은 무협의 클리세다.

사례 형양군 중모현 사람으로 젊을 때 재주가 있고 총명했기에 고향에서는 신동이라 하면서 가의(賈誼)의 짝이라 했다. 일찍이 사공, 태위부의 벽소를 받았고 수재로 천거되었으며, 태시 연간에 무제가 직접 적전 행사를 하자 반악이 부를 지으니 이를 아름다운 일이라 여기는 부를 지었다.

문장을 짓는 것에 뛰어나 맑고 고운 풍격은 채옹도 뛰어넘을 수 없는 정도라고 했으며, 조카 반니와 함께 문장으로 뛰어나 양반(兩潘)이라 불렸다. 왕은의 진서에 따르면 아버지가 낭야태수인 시절에 손수가 하급 관리로 일했는데, 반악은 손수를 여러 번 발로 차면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아 손수에게 원한을 샀다.

반악은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이름을 얻었지만 질투를 받자 10년 동안 은둔했으며, 지방에서 하양령을 지내고 재주를 자부했지만 뜻을 얻지 못해 답답했다. 산도, 왕제, 배해, 화교 등이 무제의 총애를 받자 이를 그르게 여겨 노래를 지어 퍼뜨려 그 네 명을 비판했으며, 회현령으로 옮겼고 관 내에서 복숭아, 자두 등을 심어 미담이 되었다.

가충의 서기관을 지내다가 278년에 태위연을 지냈는데, 호분중랑장을 겸임해 산기성에서 지내면서 추흥부를 지었다. 혜제 초기에는 양준의 부름을 받아 주부가 되었다가 291년에 양준이 살해당하자 제명되었으며, 양준 사후에는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하자 가밀에게 아첨해 가밀의 친구인 24우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장안령, 산기시랑, 급사황문시랑 등을 지내다가 300년에 팔왕의 난에서 손수의 모함을 받아서 체포되었다가 살해당했으며, 이전에 어머니가 분수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계시켰고 이를 듣지 않다가 체포당하자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저버렸다며 후회했다.

그의 문장은 언어를 잘 선택하고 구절이 간결해 문장의 맑고 고움을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동진 때 손작은 반악의 문장에 대해 얕지만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용모가 매우 수려하고, 풍채가 단아하면서 온화했다고 한다. 수려한 용모로 인해 하후담과 함께 딸린 옥이라 불렸으며, 그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도 몇 가지 전해질 정도다. 그가 탄궁과 같이 낙양 거리로 나가면, 여자들이 모두 손을 맞잡고 그를 에워쌌다는 이야기도 있고, 당대에는 여성들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는데[2], 외출할 때마다 여자들, 심지어는 할머니까지 그에게 과일을 던져주는 바람에 수레에 과일이 가득 찼다는 일화까지 존재한다. 여기서 생겨난 성어가 척과영거(擲果盈車)이다. 이와 정반대인 '장맹양'이라는 자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추남이었던 장맹양이 반악을 따라하는 꼴을 보고 본 여성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는 일화이다.[3]

그의 글로는 서정부, 금곡집시, 한거부, 추흥부, 도망시 등이 있다.


[1] 반안은 틀렸고 반악이 맞다는 주장도 있기는 한데, 중국의 옛 글을 봐도 반안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반악이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반악이라고 부르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은 지경이다.[2] 시경에 보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준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문화의 잔재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3] 서시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서시는 병이 있어서 얼굴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사람들이 이 모습조차도 아름답다며 감탄했는데 이웃집의 못난 여자가 이를 따라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