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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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孟欽생몰연도 불명
전진의 도사. 낙양(洛陽) 출신.
2. 생애
일찍이 좌자, 유근(劉根)의 술법을 배워, 많은 백성들이 이에 미혹되어 그를 찾아왔다. 천왕 부견은 이 소문을 듣고는 맹흠을 장안으로 소환하고, 양평공 부융으로 하여금 맹흠이 도착하면 그를 주살하여 대중을 미혹시킨 죄를 묻게 하였다.맹흠이 직접 장안성에 이르렀을 때, 마침 큰 연회를 열어 부하들과 함께 거나하게 취해 있던 부융은 좌우에 명해 맹흠을 체포케 하였다. 이에 맹흠은 선풍(旋風)을 일으켜 밖으로 빠져나왔다. 부융은 기병을 파견해 맹흠을 쫓아 장안성 동쪽으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보내는 부대마다 이미 멀어져서 잡을 없다거나, 갑작스런 내분으로 병사들끼리 싸워서 임무에 실패하였다거나, 앞에 계곡이 있어 말이 지나갈 수 없다거나 하는 등 각자 서로 다른 핑계를 대며 돌아와 결국 맹흠을 잡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부견 재위 말기에 청주(青州)에서 홀연히 목격되었다. 이때 맹홈은 전진의 낙안남 부랑과 함께 해도(海島)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