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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5대 국왕 장중화 | 張重華 | |||
출생 | 327년 | ||
전량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 |||
사망 | 353년(향년 27세) | ||
능묘 | 현릉(顯陵) | ||
재위기간 | 5대 국왕 | ||
346년 ~ 35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 장(張) | |
휘 | 중화(重華) | ||
부모 | 부친 장준 모친 엄왕후[1] | ||
형제자매 | 3남 중 차남 | ||
자녀 | 2남 ?녀[2] | ||
자 | 태림(泰臨) | ||
작호 | 양왕(凉王) |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전량: 환왕(桓王)[3] | ||
동진: 경열공(敬烈公)[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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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제5대 군주이자 명군.자는 태림(泰臨)이었다. 제4대 세조 문왕 장준의 차남으로 서자인 형 장조를 제끼고 왕위에 올랐다. 항상 행실이 단정했고, 관대했으며 의연한 성품으로 침착하여 말 수가 적었다고 한다. 아버지 장준이 마련해둔 기반을 잘 살려 전량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치세 7년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2. 생애
332년, 부왕 장준이 중견장군 송집(宋輯)의 권유를 받아들여 5살에 세자가 되었다. 이후 18세가 되어 장성했을 때 오관중랑장, 양주자사로 임명받았다.346년, 장준이 승하하고 장중화가 양왕을 승계받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도독, 태위, 호강교위, 서평공, 가양왕(假凉王)을 자칭했다. 그리고 자신의 양어머니인 왕후 엄씨를 태왕태후로 높여 영훈궁(永訓宮)에 거처하게 했고, 자신의 생모인 마씨 부인은 영수궁(永壽宮)에 거처하도록 했다. 왕에 오른 장중화는 부세와 관세를 경감하고, 궁궐의 정원을 떼어 백성들의 농지로 나누어주었다.
그해(346), 후조의 태조 무황제 석호가 서중랑장 왕탁(王擢), 정서장군 손복도, 진동장군 마추(麻秋)를 보내 전량을 침공했다. 금성태수 장충(張沖)이 마추에게 투항하고 양주의 백성들이 불안에 떨기 시작하니, 장중화는 진남장군 배항(裴恆)을 보내 후조의 군대를 막도록 했다. 배항은 광무(廣武)에서 후조군과 대치하면서 지구전으로 적을 말려 죽일 심산으로 보루를 높게 쌓고 지킬 뿐이었다. 배항의 작전을 전해듣고 여러 백관들과 의논하던 중, 사마 장탐이 나서서 말했다.
"신(臣)은 국가의 존망은 군대에 달려있고, 전투의 승패는 장군에게 달려있다고 들었습니다. 연나라가 악의를 등용했을 땐 제나라의 전역을 초토화시켰으나, 이후 기겁을 대장으로 삼는 바람에 제나라의 70여 개의 성을 다시 잃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명군(明君)들은 항상 장수와 재상을 신중하게 뽑았습니다. 국가가 위급한 현재 상황에선 반드시 좋은 군사를 써야만 합니다. 지금 의논하는 이들이 추천하는 자들은 모두 옛 신하와 숙장 뿐이라 최적의 인재를 추천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한고제가 한신을 등용한 것은 과거의 명성 때문이 아니었으며, 안영이 사마양저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옛 신하여서가 아니었고, 손권이 여몽을 승진시킨 것은 과거의 공 때문이 아니었으며, 유비가 위연을 등용한 것은 과거의 덕행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명군이 사람을 기용할 때 관례가 아닌 그 자의 재능을 꿰뚫어보기에 이들은 기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강적이 국경에 당도했음에도 제장들이 싸우지 않아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주부 사애(謝艾)는 문무를 겸비했고 지략이 출중합니다. 만약 그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물리치는 중임을 맡긴다면 반드시 저 흉악하고 미련한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장중화는 그 자리에서 사애를 불러 적군을 무리칠 방법을 묻자 사애가 대답했다."후한의 경엄은 수천 명의 군사로 도적 장보에게 맞섰으며, 황권은 10,000여 명의 군사로 적들을 무찔렀습니다. 신(臣)에게 날랜 병사 7,000명만 주신다면 전하를 위해 마추와 왕탁의 무리를 쳐 없애겠습니다."
이에 장중화는 매우 흡족해하며 사애를 중견장군에 임명한 뒤, 우선 5,000여 명의 기병만 주고 마추의 군대부터 치도록 했다. 사애의 군대가 진무(振武)에 도착한 날 밤에 대장 막사 근처에서 올빼미 두 마리가 시끄럽게 울부짓어 병사들이 불길하게 여겼지만 사애는 기뻐하며 부하들에게 말했다."올빼미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는 옛 말이 있다. 지금 올빼미가 대장 막사에서 아우성치고 있는데 이는 적을 이길 징조임이 틀림없다!"
다음날, 사애는 진군하여 마추를 격파하고 후조군의 수급 5,000개를 얻었다. 승전 후 마추는 도망쳤고 왕탁은 군사를 돌려 돌아가니, 장중화는 사애를 복록백(福祿伯)에 봉했다.347년, 다시 사애를 군사장군으로 삼고 보•기 30,000명을 주어 후조의 임하(臨河)를 치도록 했다. 용양장군 마추가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왔지만 사애에게 대패하여 장수 두훈(杜勳)이 잡혀 죽고, 용양군을 포함해 10,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장중화는 사애를 태부좌장사로 삼고 식읍 5,000호와 비단 8,000필을 하사했다. 그해(347) 5월, 마추가 120,000명의 대군을 거느린채 다시 전량을 침공해왔고, 왕탁 또한 나아가 전량의 진흥을 함락시켰다. 이번에도 장중화는 사애와 행위장군 소하(索遐)를 파견해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애를 시기한 이들이 그를 헐뜯는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얼마 안가 장중화는 사애를 주천(酒泉)의 태수로 내보냈다. 10월에 동진에서 시어사 유귀를 사자로 보내와 장중화를 정식으로 시중, 대도독, 대장군, 양주자사, 서평공에 임명했다.
349년,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과 후조를 치기로 비밀리에 약조했지만 얼마 안가 염민이 즉위하여 후조가 멸망해버렸다.
352년, 후조의 왕탁이 전진의 고조 경명제 부건에게 패배하여 전량으로 망명했다. 장중화는 왕탁을 후히 대접하고 그를 정로장군, 진주자사로 삼은 뒤, 장수 장홍과 종유 등에게 15,000명의 군사를 주어 왕탁을 도와 전진을 치도록 했다. 그들은 북평공 부석(苻碩)과 종려에서 크게 싸웠지만 대파당했고, 장홍과 종유 등은 모두 전사했으며, 왕탁은 진주를 버린채 혼자 양주로 도망쳤다. 장중화는 매우 슬퍼하며 상복을 입고 전사자들을 위해 통곡했으며, 유족들에게 직접 조의를 표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왕탁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진주를 되찾고는, 동진에 사자를 보내 전진을 정벌하겠다는 서신을 바쳤다.
353년, 동진은 조서를 보내 회답했으나 장중화는 조서를 받기 전에 병으로 승하했고, 아들 장요령이 뒤를 이었다. 동진의 효종 목황제는 장중화를 경열공(敬烈公)으로 추시했고, 훗날 그의 형 장조는 장중화를 환왕으로 추존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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