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16:20:15

하통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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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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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夏統
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기의 은사. 자는 중어(仲御). 양주 회계군(會稽郡) 영흥현(永興縣) 출신.

2. 생애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난하게 생활했지만,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심이 깊기로 소문 났고, 형제 간에도 화목하게 지냈다. 하통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산에서 나물을 채집하고, 해안가에서 조개나 방게 따위의 먹을거리를 채집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하통은 언변이 좋았기에, 그의 이런 고달픈 생활을 보다 못한 친척들이 말했다.
"경은 청량하고 정직하여 가히 군(郡)의 법과 풍기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는 마땅히 조정의 대신들과 교제하여 현직에 이를 수 있을 텐데, 어찌하여 이처럼 산림에서 고생하고 해변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일하는가!"
하통은 도리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이와 같이 대하다니! 태평성대였으면 나는 마땅히 출사하여 원개(元凱)와 더불어 정치를 논했을 것이고, 혼탁한 시대였으면 나는 굴원처럼 불의에 항거하다 진흙탕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시대 사이에 놓여 있는 때라면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처럼 밭을 갈며 은둔하는 것이 낫지, 어찌 군부(郡府)에 들어가 모욕을 견디며 살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식은 땀이 나고,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숯처럼 뜨거워지고, 귀가 먹먹해지는구나."
그러자 친척들은 크게 부끄러워하였고, 하통은 다시는 친척들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통의 어머니가 병에 걸려 그 증세가 위독해지자, 하통은 낙양으로 가 시장에서 약을 구하였다. 마침 그때가 3월 삼짇날이라 귀족,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왕공 이하의 사람들은 모두 강변으로 나와 부교(浮橋)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수많은 남녀가 어우러져 놀았고, 길가에 주차된 마차들의 촛불이 대로변을 환하게 비췄다. 그때 태위 가충이 방문하여 화려한 행렬을 뽐내면서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당시 배에 올라 시장에서 사온 약재를 말리던 하통만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를 본 가충은 호기심이 발동해 사람을 시켜 이름을 묻게 하였다. 하통은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재차 질문을 받자 짧게 답했다.
"회계군의 하중어(夏仲御)라 합니다."
가충이 다시 사람을 보내 회계의 풍속을 묻자, 하통이 답했다.
"저희 고향은 질서가 있고, 대우(大禹)의 풍속과 태백(太伯)의 의양(義讓)과 엄준(嚴遵)의 굳은 뜻과 황공(黃公)의 드높은 절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충의 사람이 또다시 질문하였다.
"경은 해변가에 거주하니 물놀이에 꽤 능하겠구려?"
하통은 그렇다 답하고는 노를 중어 중류로 나아가더니, 뛰어난 솜씨로 강 위에 풍파를 일으켜 뱅어 8 ~ 9마리를 잡았다. 그 광경을 보던 구경꾼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그 뒤로 가충이 하통에게 지역 민요를 불러달라 요청하자, 하통은 회계의 백성들이 하나라 우왕의 통치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인 〈모가(慕歌)〉, 한나라 시대 효녀 조아(曹娥)에 관한 민요인 〈하녀(河女)〉, 오자서의 의로운 죽음에 관한 노래인 〈소해창(小海唱)〉, 이 세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 그 노래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가충은 손뼉을 치며 하통에게 임관할 것을 제안했지만, 하통은 단칼에 거절하고 다시 배를 강변에 세운 후 약초 말리기를 재개하였다.

어떻게든 하통을 등용하고 싶었던 가충은 자신의 위엄과 권세를 보여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먼저 가충은 휘하의 문무 의장대로 하여금 붉은 깃발을 들게 하고, 좌우에 기병을 일렬로 서게 하였다. 이윽고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의장대와 기병들이 큰길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그 위엄을 보였고, 화려한 복장의 무희들이 나와 하통의 배 주변을 3바퀴 돌았으나, 하통은 어느것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묵묵히 약초만 말릴 뿐이었다. 이를 본 가충이 병사와 무희들을 물리고는 말했다.
"저 오(吳) 지역의 젊은이야말로 목인석심이로구나!"
이후 하통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