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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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杜夷(258 ~ 323)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자는 행제(行齊). 양주 여강군(廬江郡) 첨현(灊縣) 출신.
2. 생애
두이는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고요하고 담백하여 이익을 밝히지 않았다. 비록 그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였지만, 두이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제자백가의 경전과 서적을 탐독하면서 역사, 산수와 점술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외출 한번 하지 않고 공부하다가, 나이 40세가 되어서야 은거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1,000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두이는 혜제 사마충 재위기에 3차례나 효렴으로 천거받으면서 주(州)에서 그를 별가로 삼고자 하였고, 동해왕 사마월이 직접 마차를 보내 그를 박사로 초빙하려 했으나, 두이는 이를 모두 사양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영가 원년(307년) 3월, 황위에 오른 회제 사마치는 전국적으로 조서를 내려 각 지방에서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니, 청주자사 왕돈은 두이를 방정(方正)으로 중앙에 천거하였다. 두이는 당연히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왕돈의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출사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두이가 수양(壽陽)에 이르렀을 때, 진동장군 주복(周馥)이 예를 다해 환대하고, 그를 참군으로 삼으려 하자 두이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두이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주복은 두이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 의약품을 선물했다.
영가 5년(311년) 정월, 낭야왕 사마예가 양위장군 감탁을 보내 주복을 무찌르고 수양성을 함락시켰다. 두이는 수양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도적을 만나 위험에 처했으나, 양주자사 유도(劉陶)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건흥 3년(315년) 2월, 민제 사마업이 낭야왕 사마예를 승상에 임명하자, 사마예는 명망높은 유학자인 두이를 불러 유림좨주로 삼으려 하였다. 두이는 이번에도 병을 핑계로 거절했으나, 사마예는 포기하지 않고
나와 그대는 정이 있음에도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그 허탄한 심정이 역력하오. 설령 그대가 아프다 할지라도 직접 만나 서로를 살피며 의논하고 싶소!
라는 서신을 보내고 이후로도 끈질기게 설득하니, 계속 꾀병을 고집할 수 없었던 두이는 하는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가 국자좨주에 제수받았다. 두이는 비록 어쩔 수 없이 관직에 오르긴 했으나 업무를 소홀히 처리하는 법이 없어, 동진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원제 사마예가 조서를 내려 두이의 노고를 치하하고 곡식 200석을 하사하였다. 두이는 관직을 지내면서도 유학자로서의 명성은 그대로라, 황태자 사마소는 세 차례 친히 두이의 집에 방문에 경전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다른 조정의 관리들도 조정의 의례나 나랏일에 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두이에게 질문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원제 사마예가 붕어하고 명제 사마소가 황위를 계승하자, 두이는 자진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길 청했다. 명제 사마소는 조서를 내려 그동안의 공로에 감사를 표하고 사직을 만류하지 않았다.
태녕 원년(323년), 사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두안(杜晏)에게 장례를 소박하게 치를 것을 유언으로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 명제 사마소는 두이를 대홍려로 추증하고 시호를 '정자(貞子)'라 하였다.
두이가 생전에 집팔한 《유구자》(幽求子) 20편은 《태평어람》, 《북당서초》(北堂書抄) 등 여러 유서에 인용되었으나, 정작 그 원문은 소실되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