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5 15:43:19

기첨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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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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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오준
설겸 기첨 민홍 고영 하순
<colbgcolor=#800080><colcolor=#fff> 화용목자(華容穆子)
紀瞻 | 기첨
시호 (穆)
작위 도향후(都鄉侯) → 임상현후(臨湘縣侯) → 화용자(華容子)
(紀)
(瞻)
사원(思遠)
생몰 253년 ~ 324년
출신 단양군(丹陽郡) 말릉현(秣陵縣)
아버지 기척(紀陟)
아들 기경(紀景), 기감(紀鑒)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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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동오의 상서령 기량(紀亮)의 손자. 광록대부 기척의 아들.

2. 생애

어릴 때부터 곧고 올바른 성정을 니지고 있어 이름을 날렸다. 오나라가 평정된 후, 역양군(歷陽郡)으로 이사하여 효렴으로 살펴졌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수재로 천거받고, 상서랑 육기와의 문답에서 명답을 내놓아, 영녕 원년(301년)에 대사마 사마경의 동각좨주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언릉공(鄢陵公)의 국상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태안 원년(302년), 관직이 송자후 상(松滋侯相)으로 강등당하자, 이듬해에 기첨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흥 2년(305년) 12월, 우장군 진민이 역양을 점거하고 강동에서 할거할 생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진민은 강동의 명문가 자제들인 고영, 하순, 주기(周玘)를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이들을 포함한 강동의 명사들을 모두 주살하려 하였다. 이에 기첨, 고영, 하순 등은 힘을 합쳐 진민에게 맞섰다.

영가 원년(307년) 2월, 진민의 사돈인 감탁이 고영과 주기의 설득에 넘어가, 진민이 맡긴 정예군을 이끌고 고영 등에게 귀순하였다. 격노한 진민은 친히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요격했으나, 고영, 기첨, 주기 등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다가 강승(江乘)에서 붙잡혀 멸족되었다. 평동장군 주복(周馥)이 진민의 수급을 건네받고 낙양의 조정에 보내니, 조정에서 그 공을 인정하여 기첨을 불러 상서랑으로 삼았다. 이때 고영 등도 관직에 임명되어 중앙의 부름을 받았기에, 이들은 함께 낙양으로 향하면서 《주역》의 태극(太極)에 관해 의논하였다.

고영과 기첨 등이 서주에 이르렀을 때, 북방이 날이 갈수록 혼란해진다는 소문을 듣고 나아가지 않았다. 서주자사 배순(裴盾)은 일찍이 동해왕 사마월로부터 "고영 등이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 군례(軍禮)에 따라 그들을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었다. 배순이 장차 이를 집행하려 하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고영, 기첨 등은 타고 가던 수레와 소를 버리고, 빠른 배로 하루에 300리를 이동하여 양주로 돌아왔다.

영가 원년(307년) 9월, 안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건업(建業)에 도착하여 인재를 모으면서 기첨을 군자좨주로 삼았다.

영가 5년(311년) 5월, 회제 사마치가 낭야왕 사마예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하자, 사마예는 기첨을 진동장사로 삼았다. 사마예는 친히 기첨의 집으로 행차하여 함께 마차에 타고 돌아갈 정도로 기첨을 예우하였다. 이후 기첨은 주복, 화일을 토벌할 때도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다.

영가 6년(312년) 정월, 한나라의 장수 석륵이 갈피(葛陂)에 보루를 쌓고 둔전하면서 배를 건조하여 건업을 침공하려 하였다. 낭야왕 사마예는 기첨에게 양위장군, 도독경구이남지무호제군사(都督京口以南至蕪湖諸軍事)를 더하여 석륵을 막게 하였다. 때마침 폭우가 3달 동안 쏟아지는 바람에 석륵군은 농사를 망쳐 식량이 부족해지고, 병든 자도 태반이 되었다. 석륵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아들 석호에게 기병 2,000을 주어 수춘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습격해 탈취하였지만, 기첨이 출병하여 석호를 격파하면서 후조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 했다. 결국 석륵은 별 소득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석륵이 물러가자 기첨은 회계내사에 제수받았다.

기첨이 회계내사를 지낼 때, 어떤 자가 가짜 대장군의 부절을 이용하여 제기(諸暨)의 현령 체포한 일이 있었다. 기첨은 곧바로 그 부절이 위조된 것임을 눈치채고, 체포된 현령을 풀어준 뒤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는데, 과연 기첨의 예상대로 부절은 가짜였다.

건흥 3년(315년) 2월, 승상에 임명된 낭야왕 사마예는 기첨을 승상군자좨주로 임명하고, 이전의 진민 토벌의 공을 재평가하여 임상현후(臨湘縣侯)로 고쳐 봉하였다. 장안의 민제 사마업은 기첨을 시중으로 불렀으나, 기첨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건무 원년(317년) 3월, 장안성이 함락되고 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낭야왕 사마예는 3일간 상례를 치렀다. 기첨은 서양왕 사마양, 양주자사 왕도 등 여러 관료들과 함께 사마예에게 존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사마예가 불허하였다. 그 대신 사마예는 진왕(晉王)에 즉위하여 백관을 설치하고, 종묘사직을 세웠다.

건무 2년(318년) 3월, 민제 사마업이 평양(平陽)에서 한나라의 소무제 유총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건강(建康)에 전해졌다. 기첨 등은 다시 사마예에게 황제로 즉위할 것을 권유했으나, 사마예는 또다시 불허하고 전중장군 한적(韓績)에게 명해 어좌를 철거하게 하였다. 이에 기첨이 한적을 향해 외쳤다.
"황제의 어좌는 성수(星宿)에 상응하니, 감히 옮기는 자는 참수하리라!"
이 말을 들은 원제는 낯빛을 고쳤고, 오래지 않아 진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기첨은 시중, 상서를 역임하면서 많은 상소를 올려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이 많게 하니, 원제 사마예는 그 충렬을 무척 칭찬하였다. 이후 병에 걸려 조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상소하여 사직했으나, 곧 원제의 명령에 의해 상서우복야로 복직되었다. 기첨은 여러 번 사양했지만 원제는 전혀 듣지 않았다. 기첨은 병이 너무 위독하다 주장하며 집으로 돌아갔음에도 원제는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연주자사 치감은 당시 추산(鄒山)을 거점으로 후조의 석륵 등의 침략을 외로이 방어하고 있었다. 기첨은 치감에게 장상(將相)의 재능이 있다 여기고, 조정에서 그를 포기할까 걱정하여 치감을 중앙으로 부를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원제는 치감을 영군장군으로 삼아 수도 건강으로 불렀다.

원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명제 사마소도 기첨을 사직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서 매우 중히 여겼다. 명제가 기첨을 영군장군에 임명하자, 기첨은 병든 몸으로도 엄정한 태도를 유지하여 6군의 병사들이 모두 경외하였다. 기첨은 명제에게도 번번이 사직을 구했으나, 명제는 이를 전부 불허하고 산기상시를 겸하게 하였다.

태녕 2년(324년) 6월, 승상 왕돈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장수를 보내 건강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명제 사마소는 왕돈의 반란에 대비하면서 기첨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경은 비록 병들었으나 짐을 위해 누워서 6군을 통솔한 덕에 얻은 것이 매우 많소."
명제는 추가로 비단 1,000필을 하사해 기첨을 위로했지만, 기첨은 하사품을 전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돈의 반란이 완전히 평정된 후, 기첨은 상표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명제는 이번에도 불허하고, 조서를 내려 기첨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하고 산기상시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첨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조정에서는 생전의 관직 그대로 추증하고, 개부의동삼사를 더하였다. 또, 어사를 파견해 기첨의 상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시호는 '목(穆)'.

기첨 사후, 왕함(王含) 토벌 공로에 대한 논란이 있어 화용자(華容子)로 2등작 강등되었다. 장남 기경은 요절하였고, 차남 기감 역시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 기경의 아들 기우(紀友)가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