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1권 「선제기(宣帝紀)」 |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 3권 「무제기(武帝紀)」 | |||
사마의 | 사마사 · 사마소(昭) | 사마염 | ||||
4권 「혜제기(惠帝紀)」 |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 ||||
사마충(衷) | 사마치 · 사마업 | 사마예 · 사마소(紹) | ||||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 |||||
사마연(衍) · 사마악 |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 |||||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 |||||
사마욱 · 사마요 | 사마덕종 · 사마덕문 | |||||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 재기(戴記) ]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王接
(268 ~ 306)
1. 개요
중국 서진의 학자로 자는 조유(祖游). 사례 하동군 의씨현 출신으로 전한의 경조윤을 지낸 왕존(王尊)의 10대손이다. 그의 아버지 왕울(王蔚)도 조위의 유학자로 《지기론》(至機論)을 저술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2. 생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자 같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중 마침 인재를 찾고 있던 하동태수 유원(劉原)이 왕접에게 관심이 생겨, 13살에 불과한 그를 다른 70여명의 인재들과 함께 관직에 천거해주려 했으나 왕접이 집에서 떠나길 거부했다. 이에 유원이 "그대는 세속을 피해 은거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려 하는가?"라 묻자 왕접이 대답했다.이 접(接)은 복이 없어, 어려서부터 형제자매도 없이 외롭게 자란데다, 노모께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으니 도저히 관직에 오를 마음이 안납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병사했고 왕접은 어머니의 묘지 곁을 지키며 여러 서적들을 읽었는데, 결코 다른 뜻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정은 단순하고 솔직하여 속된 허례허식을 멀리 하였으니 명성은 자연스레 높아졌고, 평양태수 유담(柳澹), 산기시랑 배하(裴遐), 상서복야 등유(鄧攸)와 같은 이들이 왕접과 교류했다. 이후 하동군의 주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하동태수 온우(温宇)를 섬겼고, 온우는 왕접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공조로 승진시켜 주었다가 다시 수재로 중앙에 천거한 덕에 낭중이 되었다.[1]301년, 제왕 사마경이 황제를 참칭한 사마륜을 베고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을 때, 왕접은 황제가 아닌 사마경이 전권을 잡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였다. 사마경은 그를 낭중에서 제외시키고 정로장군의 사마로 옮기게 했다.
304년, 탕음에서 혜소가 목숨을 바쳐 혜제를 지키는 일이 있었다. 왕접은 사마영에게 혜소만이 그 본분을 다했다며 그를 해친 병사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 강력히 주장하니 조정에서도 이를 따랐다. 몇 개월 뒤,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영의 관직을 삭탈하고 권력을 차지하자, 상서전중랑에 임명되었다. 왕접은 사마옹 토벌을 위해 진군해오던 동해왕 사마월과 내응하기로 했으나,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