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21:57:01

대양(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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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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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일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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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戴洋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국류(國流). 양주 오흥군(吳興郡) 장성현(長城縣) 출신.

2. 생애

대양은 원래 12세에 병으로 죽었으나, 5일만에 부활했다고 한다. 그는 깨어나 말하길, 죽었을 때 천사로부터 술 창고의 관리로 임명되었고, 부록(符錄)을 수여받았으며, 깃발을 드는 수행원들을 거느렸다고 하였다. 이때 대양은 수행원들과 함께 봉래(蓬萊), 곤륜(崑崙), 적석(積石), 태실(太室), 항산(恒山), 여산(廬山), 형산(衡山) 등의 여러 산들을 순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도중에 만난 한 노인이 그에게
"너는 후에 반드시 도(道)를 깨닫게 되어, 귀인으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라 말했다고 하였다. 이후 시간이 흘러서 장성한 대양은 바람의 방향으로 길흉을 점치는 방술(方術)의 일종인 풍각(風角)에 능하게 되었다.

대양은 키가 작았고, 풍채도 수려하지 않아 일찍이 인망이 없었으나, 도술을 좋아하여 뛰어난 점술을 선보였다. 대양은 오나라에서 대리(臺吏)로 일하다가, 말기에 나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알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고, 오나라가 평정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양은 뢰향(瀨鄉)에 이르러 우연히 노자의 사당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은 그가 죽었을 때 보았던 장소와 똑같았지만, 그때 보았던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그곳의 창고지기 응봉(應鳳)에게 물었다.
"20여 년 전,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노군(老君)을 지나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가 다리도 건너지 못한 채 낙마하여 죽은 일이 있었소?"
응봉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답하자, 대양은 이어서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고,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같았다고 한다.

얼마 뒤, 대양에 관한 소문을 들은 양주(揚州) 자사가 그를 불러 길흉을 물었다. 이에 대양은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가니, 8월에는 큰 홍수가 있을 것이고, 9월에는 서남쪽에서 적군이 올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과연 실제로 그 해 8월에 큰 홍수가 일어났고, 9월에는 석빙(石冰)이 장창의 반란에 호응하여 거병하였다. 이후 석빙이 양주를 점령하자, 대양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적의 운기(雲氣)를 보아하니, 4월에 그들은 패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양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영흥 2년(305년), 당시 장창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광릉상 진민이 우장군으로 임명받자, 당읍(堂邑)의 현령 손혼(孫混)이 그를 부러워하였다. 이에 대양이 손혼에게 말했다.
"진민은 곧 반역자가 되어, 그 일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어찌 부러워하십니까!"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진민은 반역을 일으켰다. 과거 손혼이 처음 부임했을 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당읍으로 데려오려 하였는데,
"이곳은 곧 망할 것입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할 터인데, 어찌 가족을 적진으로 옮기십니까!"
라며 만류하는 대양의 말을 듣고, 이를 멈춘 적이 있었다. 그해 말 진민의 동생 진창(陳昶)이 당읍을 공격하였고, 손혼은 홀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진민의 반란은 관군에게 진압되었고, 진민과 그 동생들 역시 모두 붙잡혀 처형당하니, 모두 대양이 말한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도수(都水) 마무(馬武)가 대양을 도수령사(都水令史)로 천거하려 하자, 대양은 급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진 정권이 양주에 세워지자, 진동장군 종사중랑 장개의 천거로 대양은 승상령사(丞相令史)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마양(司馬颺)이 오정(烏程)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장차 직무를 수행하려 하자, 대양이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부하 관리를 깊고 신중히 하도록 하시오."
그로부터 얼마 안가 사마양은 부하 관리 소홀을 이유로 면직되었다. 그때 대양이 또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비록 면직되었으나, 11월에 군대를 맡아 장군이 될 것이오."
과연 대양이 일러준 시기에 사마양은 진무장군•태산(太山) 태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양이 장차 부임하러 가면서 집을 팔려 하니, 대양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그대는 결국 부임지에 이르지 못하여 돌아와야 하니 집을 팔지 마시오."
과연 사마양은 반란자 서감에 의해 길이 막혀 부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낭야왕 사마예가 사마양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조적을 돕게 했으나, 대양이 사마양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여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사마예는 사마양을 구속시켰으나, 사마양은 곧 사면받아 풀려났다.

진왕(晉王)에 오른 사마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대양을 불러 길일을 고르도록 하였다. 대양은 3월 24일 병오일이 적당하다고 하였으나, 태사령 진탁(陳卓)은 22일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했다.
"옛날 월왕(越王)이 갑진(甲辰)일에 나라를 되찾았는데, 이때 범려가 말하기를 '양(陽)이 앞에 있으니, 주인이 모두 떠나고, 상하가 모두 비어, 덕(德)이 나갈 것이며, 형(刑)은 중궁(中宮)에 들어올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지금의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대양이 반박하며 말했다.
"월왕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있었고, 당시에는 겸손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범려는 그래서 갑진일을 써서 덕으로 돌아오고, 형을 오궁에 남겼습니다. 지금 대왕은 내부에 원한이 없고, 외부에도 원한이 없습니다. 천명(天命)을 이어 무궁한 복을 받아야 하건만, 어찌 월왕이 나라를 떠나고 재앙만 남은 날을 따르겠습니까!"
이에 사마예는 대양의 말을 채택하였다.

대흥 4년(321년) 10월, 조적이 죽으면서 초(譙)를 대신 통치하게 된 그 동생 조약은 조정에 청하여 대양을 자신의 휘하로 배속시키고, 그를 중전군(中典軍)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도호(督護)로 승진시켰다.

영창 원년(322년) 4월 7일[1], 갑자기 큰 바람이 남동쪽에서 일어나 나무들을 부러뜨렸다. 대양이 조약에게 말했다.
"10월에 적이 초성(譙城) 동쪽에 도착할 것이며, 역양(歷陽)으로 가는 동안 남쪽에서 반란이 있을 것입니다."
주부 왕진(王振)은 대양이 요사스런 점쟁이라 여겨 대양을 체포한 뒤, 조약에게 이를 보고하면서 그의 식량을 50일 동안 끊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양에게 신술(神術)이 있는 것을 알고있던 조약은 그를 석방하고 오히려 왕진을 꾸짖었다. 이후 왕진이 죄를 지어 체포되었으나, 대양이 그를 위해 변호하였다. 이에 조약이 대양에게 물었다.
"왕진은 예전에 그대를 공격했는데, 어찌하여 그를 구하려 하는가?"
대양이 답했다.
"왕진은 풍각(風角)을 몰라서 그런 것이며, 특별히 원한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또, 왕진이 예전에 굶어 죽을 뻔했을 때 제가 그를 살렸으나, 왕진은 그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부귀한 자가 빈천한 자를 버리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조약은 이를 의롭게 여겨 왕진을 사면하고, 대양에게는 쌀 30석을 하사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10월 3일[2], 후조의 조왕 석륵이 기병을 거느리고 초성 동쪽에 도착하였다. 대양이 조약에게 말했다.
"적은 반드시 성부(城父)로 갈 것이니, 기병을 보내 강 남쪽에서 그들을 추격하고, 보병을 강 북쪽에 배치하여 요로(要路)를 차단하면 적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약은 끝내 추격하지 않았고, 석륵은 성부로 진격하여 부녀자와 재물을 약탈해 갔다. 후조군이 물러갈 때, 조약의 장수 노연(魯延)이 나서서 적을 추격하자 청하니, 대양이 반대하였다. 조약은 또 대양의 말을 듣지 않고, 조카 조지(趙智)와 노연을 보내 후조군을 추격하였다. 석륵은 일부로 성부에서 약탈한 부녀자와 재물을 버리면서 도망쳤고, 조지와 노연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다가 석륵이 군대를 돌려 그들을 덮치면서 군대가 전멸하고 말았다. 조지와 노연은 가지고 간 병력을 전부 상실한 채 목숨만 건져서 돌아왔다.

조약이 조정에 상표하여 대양을 하읍장(下邑長)으로 추천하였다. 그 당시 양국(梁國)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원안(袁晏)을 쫓아냈는데, 조약은 그들을 토벌하려 하고 싶었으나, 양성(梁城)은 험난하고 높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때 대양이 말했다.
"도적들은 8월 신유일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날은 덕(德)이 남쪽에 있어, 유(酉) 스스로 형(刑)을 받습니다. 양성(梁城)은 초성 북쪽에 있으며, 덕을 타고 형을 정벌하면 도적은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또한 갑자일에 동풍이 불고 서쪽으로 천둥이 칠 것입니다. 초성은 남동쪽에 있고, 천둥이 군대의 앞에 있으니, 이는 군대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옛날 오나라관우(關羽)를 정벌할 때, 천둥이 앞에 있었고, 주유(周瑜)는 이를 축하했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으니,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조약은 그의 말을 따랐고, 양성에서 일어난 반란은 평정되었다.

태녕 3년(325년) 정월, 큰 유성이 남동쪽으로 날아가니, 대양이 이를 보고 말했다.
"가을이 되면 부(府)는 수양(壽陽)으로 옮겨질 것이다."

태녕 3년(325년) 7월, 대장군 왕돈이 재차 거병하자, 조약이 대양에게 그 승패를 물었다. 대양이 답했다.
"태백성(太白星)은 동쪽에 있으나, 진성(辰星)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법에 따르면, 먼저 거병하는 자가 주인이 되고, 응하는 자는 손님이 됩니다. 진성이 나왔다면 태백성이 주인이 되고, 진성은 손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성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태백성(太白星)이 손님이 되었으니, 먼저 거병한 자가 패할 것입니다. 지금 주인이 없고 손님만 있으며, 앞이 있고 뒤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서에 응하여 부대에 명령을 내리고 왕돈을 토벌해야 합니다."
이에 조약은 군대를 이끌고 합비(合肥)로 향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돈이 병사하고 그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 조약은 수양으로 가 머무를 때, 대양이 그에게 나아가 말했다.
"강회(江淮)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초성(譙城)이 비어있으니, 의당 돌아가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옹구(雍丘)와 패(沛)를 모두 관할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약은 이를 듣지 않고, 과연 대양의 말대로 후조군이 남하하여 예주(豫州)의 땅을 모두 함락시켰다.

함화 원년(326년) 2월, 조약이 남쪽으로 내려가 둔전을 시행하였는데, 갑자기 큰 천둥과 비가 남서쪽에서 몰아쳤다. 이를 본 대양이 말했다.
"갑자(甲子)일에 남서쪽에서 천둥이 치니, 여름에 반드시 대장을 잃을 것이다."
과연 여름이 되자, 여남(汝南)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약의 조카 조제(趙濟)를 사로잡아 조왕 석륵에게 보냈다.

어느 날, 조약의 부내(府內)의 땅이 갑자기 붉게 변하자, 대양이 조약에게 말했다.
"《하도정(河圖征)》에서 이르기를, '땅이 붉게 변하고 피가 둥글게 맺히면, 하극상이 일어난다.'라 하였습니다. 10월 27일에 호마(胡馬)가 와서 회수(淮水)를 마실 것입니다."
과연 그 시기에 석륵이 대규모의 기병을 이끌고 와 수양성을 공격하였다. 그 날 서풍이 불어 전투가 격렬해지자, 조약은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이내 풍향이 바뀌면서 적이 퇴각하였다. 얼마 뒤, 석륵이 수양으로 다시 기마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지니, 조약은 가족들을 강동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대양이 그럴 일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오래지 않아, 소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함화 초기에 달무리가 왼쪽 각에서 나타났는데, 붉고 흰 기운이 있었다. 조약이 이에 관해 대양에게 물으니, 대양이 답했다.
"각(角)은 하늘의 문으로, 양도를 열고 펼치는 것이니, 관문(官門)에 곧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양내사 소준이 조약에게 사자를 보내 함께 반란하자 종용하였고, 마침 조정에 불만이 많던 조약 또한 동조하여 그와 손잡고 거병하였다. 이때 대양이 다시 조약에게 말했다.
"소준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나, 그가 처음 거병할 때, 그의 병력은 막기 어려울 것이니, 겉으로는 화친하고 속으로는 대비하여 그 변화를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조약은 따르지 않고, 소준의 반란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함화 3년(328년) 5월, 큰 천둥과 비바람이 서북쪽에서 몰아쳐 성 안이 어두워졌다. 대양이 조약에게 말했다.
"천둥이 사람 위에서 울리니, 명군(明君)은 간사한 자를 멀리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 진(秦)나라에도 이러한 변고가 있었는데, 결국 혼란해져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들은 조약은 크게 노하여 대양을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

조약이 보낸 부장 이개(李概)의 부대가 여강에 이르렀을 때 그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고, 소준도 전사하면서 반란이 관군에게 진압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에 조약은 감옥에 갇혀있던 대양을 불러 물었다.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과 수양에 머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혹은 수양에 머무는 것과 호(胡, 후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대양이 답했다.
"동쪽으로 가면 절반을 잃을 것이고, 호(胡)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가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수양에 머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조약은 따르지 않고 동쪽 역양으로 향했으나, 그의 부하들은 동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아 모두 배반하고, 조약의 누이와 형수를 납치해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조약이 역양에 도착하자, 조약의 조카인 조환(祖煥)이 대양에게 물었다.
"그대는 예전에 평서장군(조약)께서 수양에 5년 동안 머물 것이라 했고,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소. 이제 역양에서는 얼마나 있을 수 있겠소?"
대양이 말했다.
"6개월뿐입니다."
이후 이번에는 조약이 대양에게 물었다.
"지금의 이 시기와 기후(氣侯)는 어떠한가?"
대양이 답했다.
"반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나, 내년 3월에는 태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강주(江州)에 큰 상(喪)이 있을 것이고, 남쪽 지역에는 다시 전쟁이 있을 것인데, 이곳에서 천 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약의 장수 견등(牽騰)이 배반해 관군에게 투항하였고, 조약은 측근과 친족 수백 명을 인솔해 후조로 달아났다. 2월에는 소준의 잔당이 완전히 진압되어 정치가 다시 올바르게 돌아갔고, 4월에는 온교가 병사하였으며, 그 다음 해 12월에 곽묵이 분구(湓口)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석륵이 망명해온 조약과 그 친족들을 멸족하였는데, 이것 모두 대양이 말한 것과 일치하였다.

한편, 조약이 패망한 후, 대양은 그와 헤어져 심양(尋陽)으로 갔다. 당시 심양을 진수하고 있던 산기상시 유윤이 대양을 불러 물었다.
"내 병이 곧 낫겠는가?"
대양이 답했다.
"사군께서는 낫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올해 큰 위기를 맞을 것입니다. 사군께서는 47세인데, 이 해는 경인년에 해당합니다. 《태공음모(太公陰謀)》에 따르면 '육경(六庚)은 흰 짐승으로, 하늘에서는 객성(客星)이며, 땅에서는 해로운 기운이 된다.'라 하였습니다. 해와 명이 겹치면 반드시 흉하니 주의해야 합니다. 12월 22일 경인일에 손님을 만나지 마십시오."
유윤이 말했다.
"내 지금 사직하고 그대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병을 치료하겠소."
대양이 말했다.
"사군께서는 장차 강주(江州)를 다스리게 될 것이니, 스스로 그 직을 해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유윤이 다시 물었다.
"온공(溫公, 온교)께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대양이 답했다.
"온공께서 돌아오시더라도, 여전히 강주는 사군께서 다스릴 것입니다."
이내 대양의 말대로 유윤은 강주자사로 임명되어 강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함화 4년(329년) 5월 13일[3], 신시(申時)에 회오리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유윤의 아들의 배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지나갔는데, 그 모습이 족히 5~6장 정도 되었다. 이에 대양이 유윤에게 말했다.
"바람은 함지(咸池)에서 내려와 섭제(攝提)로 내려갔습니다. 함지는 병기(兵器)를 의미하며, 대규모 살상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일 신시에, 부내(府內)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입니다."
유윤은 어디에 있어야 안전할지에 대해 물으니, 대양이 답했다.
"주부(州府)의 문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이에 유윤은 부의 동문에 거처를 마련하였는데, 대양 이를 보고 다시 말했다.
"동쪽은 하늘의 감옥입니다. 감옥 아래 문을 열면 하늘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유윤은 듣지 않았다.

함화 4년(329년) 12월 17일[4], 대양이 또 유윤에게 말했다.
"납일(臘日)이 가까우니, 폐문하고 50명의 경비병을 준비시켜야 하며, 100명을 동북쪽 인상(寅上)에 배치하여 해로운 기운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윤은 또 듣지 않았고, 같은 달 24일에 곽묵에게 살해되었다.

곽묵의 반란이 태위 도간에 의해 진압된 후, 남중랑장 환선은 대양을 참군으로 삼아 양양(襄陽)으로 데려가려 하였으나, 도간이 이를 저지하고 그를 무창(武昌)에 남겨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였다. 당시 도간은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대양이 말했다.
"지난해 11월 형혹성(熒惑星)이 위수(胃宿)와 묘수(昴宿)를 지켰는데, 올해 4월까지 500여 일 동안 묘수를 지켰습니다. 묘수는 옛 조(趙)의 영역에 해당하니, 석륵이 곧 죽을 것입니다. 형혹성은 7월에 후퇴할 것이고, 비수(畢宿)는 오른쪽으로 순행하여 황도(黃道)로 들어갈 것이나, 하늘의 관문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8월 22일에 다시 역행하여 비수(畢宿)로 돌아와 묘수를 향할 것입니다. 묘수와 비수는 변경의 병사로, 오랑캐를 주관하며, 하늘의 활을 놓아 쏘는 것을 상징합니다. 형혹성이 역행하는 것은 덕이 없는 나라를 주관하는 것이니, 석륵의 죽음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석륵이 죽게 되면 그의 잔여 세력은 자멸할 것입니다.

올해 천관(天關)과 태세(太歲), 태음(太陰)이 세 합을 이루니, 계사(癸巳)는 북쪽에 해당하여 북쪽은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세진(歲鎮) 두 별이 함께 익진(翼軫)에 머물 것이며, 자시(子時)에서 사시(巳時)까지 6년 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형초(荊楚) 지역은 세진이 머무르는 곳이니, 그 아래 나라는 번창할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공덕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올해 6월, 진성(鎮星)이 각수(角宿)와 항수(亢宿)에 있습니다. 각수와 항수는 옛 정(鄭)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세성(歲星)은 방수(房宿)에 머물고, 태백성(太白星)은 심수(心宿)에 있습니다. 심수와 방수는 옛 송(宋)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이에 따르면 번창할 것이고, 거스르면 멸망할 것입니다. 이때 석호가 병력을 일으켜 동남쪽으로 쳐들어온다면, 이는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공(公)이 하늘의 뜻을 따라 형벌을 행하고, 바로 송(宋)과 정(鄭)의 영역을 점령한다면 적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거꾸로 하면 오히려 그 죄를 받을 것입니다."
중원을 수복할 뜻이 있었던 도간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였으나, 노환으로 병이 깊어져 끝내 북벌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함화 9년(334년) 6월, 도간이 무창 서쪽 번계(樊谿)에서 사망하자, 정서장군 유량(庾亮)이 그를 대신해 무창을 진수하였다. 유량이 대양을 불러 기후(氣侯)에 대해 물으니, 대양이 답했다.
"하늘에 백기(白氣)가 있으니, 상(喪)은 분명 동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이는 몇 년 안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슴이 서성문(西城門)으로 향하자, 대양이 다시 유량에게 말했다.
"야생의 짐승이 성으로 들어가니, 주인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 동쪽의 한 가정에서 한밤중에 성 내에서 여러 횃불이 커다란 수레처럼 보였고, 흰 천으로 덮인 채 성 동북쪽으로 나가 강에 이르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양은 이를 듣고 탄식하며 유량에게 말했다.
"저것이 전에 말한 백기(白氣)인가 봅니다."

함강 3년(337년), 대양이 유량에게 말했다.
"무창의 땅은 산이 있고 숲이 없으니, 정치를 시작하기는 좋으나 오래 머물기는 어렵습니다. 산이 팔자(八字)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숫자가 구(九)에 미치지 못합니다. 옛날 오나라가 임인년에 올라와 이곳에 궁성을 창립했으나, 기유년에는 말릉(秣陵)으로 돌아갔습니다. 도공(陶公)도 이곳에 8년을 머물렀는데, 땅의 성쇠는 일정하고, 사람의 마음도 떠나고 오는 시기가 있으니, 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다른 좋은 장소를 선택해야 하며, 무창에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함강 5년(339년) 3월, 유량이 예주자사 모보를 주성(邾城)에 주둔시켰다.

함강 5년(339년) 9월, 대양이 유량에게 말했다.
"모 예주(毛豫州)는 올해 죽을 운명을 받았습니다. 어제 아침에 큰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지 않았으니, 원수들이 복수하러 와서 제후를 공격하고 포위할 것입니다. 속히 정찰대를 멀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량이 모보에게 화가 닥칠 일이 언제인지 물으니, 대양이 답했다.
"50일 내입니다."
그 날 저녁, 대양이 다시 유량을 찾아와서 말했다.
"술월(戌月)에 주작이 날아 놀라게 하고, 정군(征軍)이 돌아와 불빛을 따라갔는데, 이는 하늘이 보여준 징조입니다. 재앙이 동방에서 발생하고,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니,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대양이 또다시 말했다.
"어젯밤의 불길은 나라의 복이 아니니, 올해 집을 짓는 것은 병을 일으킬 것입니다. 집을 태우고 남쪽으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모보는 즉시 자식과 며느리를 무창으로 돌려보냈다.

함강 5년(339년) 10월, 곧 후조군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양이 유량에게 말했다.
"10월 정해일 야간에 적이 올 것입니다. 건(乾)은 군대를 상징하고, 지(支)는 신하를 상징하며, 정(丁)은 정서부(征西府)를, 해(亥)는 주성(邾城)을 상징합니다. 공조(功曹)는 적의 신(神)을 상징합니다. 자시(子時) 10월에는 물이 왕(王)하고 나무가 상(相)하니, 왕과 상의 기운이 합쳐져 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인수(寅數)는 7이고, 자수(子數)는 9이니, 도적은 최대 9,000명, 최소 7,000명일 것입니다. 두루미는 귀인을 상징하고, 정일(丁日)에 하극상이 일어날 것이니, 무창으로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얼마 뒤에 무제 석호가 군대를 보내 주성을 함락시켰고, 모보는 도망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주성을 함락시킨 후조군이 변경을 어지럽히자, 유량이 대양에게 물었다.
"석성(石城)을 지킬 수 있겠는가?"
대양이 답했다.
"적이 안륙(安陸)에서 석성(石城)으로 향하니, 태백성(太白星)을 거스르게 되어 몸을 다칠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유량이 다시 물었다.
"하늘이 어찌하여 호(胡)족을 도와 우리를 괴롭히는가?"
대양이 답했다.
"하늘에는 길흉이 있고, 땅에는 성쇠가 있습니다. 올해는 해로운 기운이 기해년과 삼합(三合)하니, 기(己)는 천하를, 해(亥)는 융호(戎胡)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석호 또한 곧 죽을 운명입니다. 이제 도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공의 병이 걱정입니다."
유량이 물었다.
"어디로 가면 나의 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
대양이 답했다.
"형주(荊州)는 병란을, 강주(江州)는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공은 이 두 주를 떠나야 합니다."
유량이 다시 물었다.
"그리하면 해결되는 것인가?"
대양이 답했다.
"이미 늦었으나, 그래도 조금은 나을 것입니다."

유량은 끝내 두 주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얼마 후 의양(儀陽)까지 후조군에게 넘어가면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양이 유량에게 말했다.
"과거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공은 백석사(白石祠)에서 복을 기원하며 소를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하였으나, 지금까지 지키지 않아 귀신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유량이 말했다.
"실로 그렇소. 그대는 참으로 신인(神人)이오."
어느 날, 누군가가 대양에게 물었다.
"유공(庾公)은 얼마의 시간을 더 살 수 있겠습니까?"
대양이 답했다.
"내년까지입니다."
당시 유량은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팠으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대양의 말을 망언이라 여겼다. 그러나 함강 6년(340년) 정월 초하루에 유량이 사망하였다.

유량 사후, 그의 동생 유익(庾翼)이 형을 대신하여 무창을 진수하였다. 대양은 유익의 밑에서 점을 봐주다가 8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적중한 점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3. 기타 일화들

  • 어느 날, 대양은 낙양(洛陽)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꿈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길,
    "낙양은 곧 패할 것이며, 사람들이 모두 남쪽으로 건너갈 것이고, 5년 후에는 양주(揚州)에 반드시 천자가 나올 것이다."

    대양은 이를 믿고 가지 않았으며, 결국 모두 그의 꿈대로 되었다.
  • 여강(廬江) 태수 화담이 대양을 불러 물었다.
    "천하에서 누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대양이 답했다.
    "왕기(王機)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기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 한번은 진진(陳眕)이 대양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남(江南)에서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하던데, 고언선(顧彥先)과 주선패(周宣珮) 둘 중 누가 그 귀인이겠소?"

    대양이 답했다.
    "고언선은 섣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주선패는 내년 8월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고언선은 12월 17일에 죽어, 대양이 말한 때로부터 섣달이 되는 날인 19일을 넘기지 못했으며, 주선패는 다음해 7월 말에 죽었다.
  • 어느 날, 병에 걸린 왕도가 대양을 불러 이에 대해 물으니, 대양이 답했다.
    "군후(君侯)의 본명(本命)은 신(申)에 있는데, 금(金)이 토(土)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금 신(申)에 있는 석두(石頭)에서 제련소가 세워졌고, 그 불빛이 하늘을 비추니, 이는 금과 불이 서로 태우고, 물과 불이 서로 끓이는 것과 같아 해를 입은 것입니다."

    이를 들은 왕도는 즉시 동부로 거처를 옮겼고, 병이 곧바로 나았다고 한다.


[1] 임오년 을사월 경진일. 음력으로 4월 7일이고, 양력으로 5월 9일이다.[2] 임오년 신해월 계미일. 음력으로 10월 3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9일이다.[3] 기축년 경오월 갑인일. 음력으로 5월 13일이고, 양력으로 6월 25일이다.[4] 기축년 정축월 을유일. 음력으로 12월 17일이고, 양력으로 330년 1월 2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