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의 반역자 조적(曹頔)에 대한 내용은 조적(고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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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祖逖 조적 | |
성 | 조(祖) |
이름 | 적(逖) |
자 | 사치(士稚) |
생몰 | 266년 ~ 321년 |
출신 | 범양군(范陽郡) 주현(遒縣) |
국적 | 위(魏) → 진(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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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의 장군. 자는 사치(士稚)다. 진나라의 제5대 황제 중종 원황제가 아니 도움에도 실지(失地)를 수복하는 북벌을 거의 혼자서 맡아 했으나, 조정이 돕지 않아 홧병으로 죽고, 그가 죽자 수복한 영토는 다시 석륵에게 빼앗긴다.2. 생애
범양군(范陽郡) 주현(逎縣, 현재 바오딩시) 사람으로 이곳은 현재의 허베이성에 위치해 있다. 범양조씨(范陽祖氏)는 북방의 귀족으로 위나라 - 진나라를 대대로 섬겼다. 어려서부터 무예와 학문을 열심히 익혔고, 진나라 조정에 출사했으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서 회제가 포로가 되고 중원을 잃자 강남으로 달아나 원제를 섬겼다. 원제는 조적을 처음에는 서주자사로 삼았다.조적은 북벌을 적극 주청했고, 사마예는 그를 석륵이 세운 후조(後趙)가 점령하고 있는 예주자사로 임명했으나, 그다지 병력을 주지는 않았다. 이렇게 소극적인 원제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오랑캐로부터 실지를 수복하려고 수백명의 병력을 끌고 장강을 건너 북벌에 나섰다. 그는 엄격한 군기로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면서 오랑캐의 지배에 분개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의병을 모았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 수만명에 이르렀고, 북벌군은 석륵의 후조군을 격파하며 진나라의 원래 서울인 낙양 근처까지 진주했다.
이러자 건강(난징)으로 천도한 원제와 조정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했다. 원제는 조적의 북벌이 성공하면, 조적의 공은 하늘을 찌를 것이고, 조조나 사마의처럼 대군벌 권신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칙명과 사자를 계속 보내서 조적의 북진을 방해했다. 나중에는 장강 북쪽을 총괄하는 서정장군으로 대연(戴淵)을 임명하여 겉으로는 돕는척 하면서 조적을 감시했다. [1] 조적은 사마예의 이런 속좁은 우려를 한탄하다가 결국 홧병으로 56세에 사망했다.
그는 예주의 옹구에 묻혔는데, 이곳은 왕돈의 난이 일어나자 곧 다시 후조군이 수복했다. 오랑캐가 조적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 할 것을 우려한 의병들은 5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 한가운데로 쳐들어가 옹구에 묻힌 조적의 묘를 파헤쳐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이 과업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500명의 결사대는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적이 소수의 병력으로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아직 하남 지역에서 후조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고 수많은 유민, 산적들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북조의 중심이된 오호세력 (선비, 저, 갈, 강, 흉노)은 군사력은 강했지만 문화수준이 매우 낮은 북방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화북지역의 한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진정부가 장강 이남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북조의 영역은 비록 나라가 있더라도, 제대로된 행정이 없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고, 오호가 세운 각국들도 몇십년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이런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이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효문제이며, 효문제는 한화정책을 시행, 선비족 자신이 스스로 한족화되려고 했다. 이때문에 북조는 이전의 생산력에 오랑캐 특유의 군사력이 합쳐서 더욱 강해졌으며, 이후의 남조의 북벌 시도들은 유유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 결국 북조 및 한화된 선비족의 후예인 수나라가 남조를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1] 대연은 오나라의 태위 대창의 아들로, 오나라가 멸망하자 진나라에 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