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09:03:24

왕몽(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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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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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濛
(309 ~ 347)

동진의 인물. 자는 중조(仲祖). 병주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출신으로 동진 시기 명문가 중 하나인 태원 왕씨의 일원이다. 삼국시대 조위의 상서 왕묵(王默)[1]의 증손자. 서진의 북군중후 왕우(王佑)의 손자. 동진의 신감현령 왕납(王訥)의 아들. 여릉태수 왕교의 조카. 애정황후 왕목지의 아버지.

2. 생애

왕몽은 젊어서부터 방종하여 마을에서 망나니로 찍혀 무시당했으나, 나이를 더 먹은 후에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공부하여 풍류를 갖추는 동시에 아름다운 명예를 얻었다. 그럼에도 왕몽은 자만함 없이 항상 겸허히 행동했고, 남을 용서할 줄 알며, 생각이 깊어 함부로 행동하는 법이 없으니, 그를 경애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어머니를 모실 때는 행동을 삼갔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외모까지 뛰어났는데, 왕몽 본인 또한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는지 항상 거울을 보며
"왕문개(王文開)가 이토록 빼어난 아이를 낳을 줄이야!"
라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개는 아버지 왕납의 자(字)이다. 그리고 한번은 두건이 찢어져서 새로운 두건을 사기 위해 시장을 구경하던 중, 한 노파가 왕몽의 용모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며 그를 위해 새 두건을 사주는 일도 있었다.

왕몽은 패국 출신의 유담과 더불어 명사로 이름을 날렸는데, 둘은 절친한 사이라 만나면 언제나 서로를 칭찬하였다. 왕몽은 유담을 가리켜
"유군(劉君)의 나에 대한 지식은 나 자신보다도 낫다."
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유담을 순찬, 왕몽을 원환에 비유하였고, 둘은 당대 풍류의 본보기가 되었다.

함강 원년(335년) 3월, 사도 왕도가 왕몽을 불러 연(掾)으로 삼았다. 광술(匡術)의 동생 광효(匡孝)는 역적 소준의 잔당으로 활동하다가 대사면령이 내려지고 투항했는데, 왕도가 그를 등용하려 하자 왕몽이 간했다.
"나라를 세우거나 가문을 계승할 때 소인은 쓰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지팡이를 들어 천하를 윤택하게 하고, 변치 않는 인륜을 바로 세워 지방을 맑게 하려면 진귀한 인재를 중용해야 합니다. 사내는 군인이 되어 나라의 특별한 쓰임을 받아야 하고, 문신과 무신은 서로 다르게 취급되어야 할진대, 어찌 소인을 기용하여 탁한 물과 맑은 물이 섞이게 하고, 맑고 화목한 기풍을 이지러지게 하려 하십니까? 그 자를 내쳐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하고,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소서!"
왕도는 답을 하지 않고 왕몽을 장산(長山)의 현령으로 삼아 잠시 내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여 사도 서조속(左西屬)으로 삼았다. 하지만 왕몽은 속관으로 근무하다 실수를 저지르면 장형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 해 굳게 사양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장형을 잠정 중지시켰으나 왕몽이 고집을 꺾지 않으니, 결국 조정에서는 그를 중서랑에 임명하였다.

영화 2년(346년) 2월, 어린 목제 사마담을 도와 국정을 보좌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명사를 흠모하여 왕몽과 유담을 빈객으로 초빙하였다. 이때 왕몽은 사도 좌장사로 옮겨졌다. 얼마 뒤, 동양태수 산하(山遐)가 사망하자, 왕몽은 본인이 동양에 부임하여 그를 대신하길 청했지만 회계왕 사마욱이 불허하였다. 왕몽은 이내 사마욱에 대한 원망과 한스러움으로 병을 얻고 말았다. 왕몽은 병을 앓으면서도 사마욱을 욕했다.
"사람들은 회계왕을 가리켜 어리석다 말하는데, 과연 바보가 따로 없구나!"

영화 3년(347년), 왕몽의 병은 날이 갈수록 위독해져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왕몽은 등잔 아래에서 고라니 꼬리털로 만든 먼지떨이를 휘두르면서 한탄하였다.
"나 정도 되는 인간이 일찍이 40년의 수명도 받지 못 했구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39세. 왕몽의 빈소를 들른 유담은 그의 관 안에 왕몽이 생전에 아끼던 먼지떨이를 넣어주고 몹시 애통해 하였다.

아들로는 왕수(王脩), 왕온이 있는데, 이 중 왕수는 12살에 《현전론(賢全論)》을 홀로 썼을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1] 왕암(王黯)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