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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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兆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연세(延世). 청주 제남군(濟南郡) 동평현(東平縣) 출신. 전한의 광천혜왕 유월(劉越)의 후손.
2. 생애
유조는 박학하고 온화한데다 사람을 가르치는 재능까지 있어, 그를 따르는 제자가 1,000여 명에 달했다. 무제 사마염 재위기에 관아로부터 5번 징소되었고, 조정으로부터 박사로 3번 초빙받았으나, 유조는 전부 이에 응하지 않았다.안빈낙도하는 생활을 누리면서 책을 저술하고 싶었던 유조는 수십 년간 집 안에 틀어박혀 《춘추》의 3대 주석서인 《춘추좌씨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을 연구하였다.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선 세 서적을 둘러싸고 어느 것이 더 나은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유조는 세 서적을 모두 비교·분석하고 각자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결국 하나로 통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춘추좌씨전》을 해석하여 《춘추좌씨전종》(春秋左氏全綜)을 집필하고, 곡량전과 공양전에는 주석만 달았다.
그리고 《주례》의 관직 체계를 분석하여 70,000여 마디로 이루어진 《춘추조인》(春秋調人)을 편찬하고, 《주역훈주》(周易訓註)를 써 《주역》에 대해 극찬하였다. 유조는 그렇게 은거하면서 유학 공부에 힘쓰다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탁(劉卓), 유소(劉炤), 유요(劉燿), 유육(劉育), 유제(劉臍) 총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