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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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霍原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기의 은사. 자는 휴명(休明). 유주 연국(燕國) 광양현(廣陽縣) 출신.
2. 생애
곽원은 어려서부터 지혜와 재능이 있어, 숙부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히자, 직접 감옥을 찾아가 송사하여 최종적으로 숙부가 형을 면제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곽원이 18세가 되었을 때 태학에 들어가 예(禮)를 금세 익혔는데, 그 소문이 퍼져 귀족의 자제들이 그와 교류하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명성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곽원은 오히려 그들을 만나길 꺼려 하여 낮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주로 밤을 틈타 일하였다. 아버지 친구이자 같은 고을 사람인 유대(劉岱)가 장차 곽원을 천거하려 했으나, 병이 위독해져 그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유대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 유침에게 말했다."곽원은 도(道)에 순응하고 청허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그 기량이 범상치 않으니, 너는 후에 반드시 그를 천거하도록 하라."
이후 본읍대중정에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유침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곽원을 2품 관직에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도가 유침의 추천을 기각시키니, 유침은 조정에 상표하여 재검토를 요청하였다. 이에 무제 사마염은 사도를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게 하였고, 회의 끝에 중서감 장화와 진준의 주장을 받아들여 곽원을 등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곽원은 산에 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두고 있었으며, 연왕(燕王)도 그를 존경한 나머지 다달이 양고기와 술을 선물할 정도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다. 조정에서 누차 사람을 파견해 예를 갖추고 곽원을 불렀으나, 곽원은 모두 응하지 않고 임관을 끝까지 거부하였다.영가 5년(311년) 7월, 수도 낙양이 한나라의 유총에게 함락되고 회제 사마치가 압송당하자, 유주자사 왕준이 주제넘게 칭제를 꿈꿨다. 왕준은 부하들에게 직접 관직을 내리면서 곽원도 불렀으나, 곽원이 답장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원망하였다. 또, 요동의 죄수 300여 명이 탈옥하여 산적이 되었는데, 이때 죄수들은 곽원을 겁박하여 무리의 주사(主事)로 추대하려 했지만, 곽원의 고집을 꺾지 못 해 실패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유주에서 갑자기 이런 동요가 유행하였다.
"천자는 어디 있는가? 근처 콩밭에 있다네."
(天子在何許?近在豆田中)
"빠를 곽(霍)"은 콩잎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에, 왕준은 이 동요에서 말하는 "콩(豆)"이 곽원이라 해석하고, 그를 붙잡아 참수한 뒤, 그 수급을 매달았다. 곽원의 억울한 죽음에 모든 백성들은 슬피 통곡하였고, 밤에 곽원의 수급과 시체를 훔쳐서 어딘가에 매장하였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달받은 다른 지역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원통함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天子在何許?近在豆田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