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4:33:00

범육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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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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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氾毓
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치춘(稚春). 청주 제북군(濟北郡) 노현(盧縣) 출신. 전한 시기 명망높은 유학자인 범승지(氾勝之)의 후손으로 추정된다.[1]

2. 생애

범육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자를 배출해낸 집안으로 9족이 항상 화목하였고, 청주(靑州)에 정착해 일곱 대에 걸쳐서 그곳에 거주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집안의 화목함을 칭송하며 이르길,
"아이에게 정해진 아비가 없고, 옷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라 하였다.

범육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지조를 갖추었고, 안빈낙도를 누리면서 학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범육은 부친의 묘소 곁에 막집을 짓고 30여 년 동안 정성스럽게 묘지를 관리하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아버지 묘지 관리에 보내다가 마침내 집에 돌아와서 두문불출하고 학업에 몰두하였다.

당시 범육은 청주의 또다른 은사인 유조, 서묘와 더불어 학자로서의 명성을 나란히 하니, 무제 사마염은 범육을 남양왕문학(南陽王文學), 비서랑, 태사참군으로 여러 번 초빙했으나 범육은 전부 응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삼전》에 주석을 달았고, 《춘추석의》(春秋釋疑), 《육형론》(肉刑論) 등 여러 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71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무제가 그를 초빙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묘소를 30여 년 동안 관리한 것으로 보아 위나라 시기에 태어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1] 범승지는 본래 "범(凡)"을 성씨로 썼으나, 초한쟁패기 시절 전란을 피해 범수(氾水)를 건널 때 성을 "범(氾)"으로 고쳤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원래부터 氾을 성씨로 쓰던 둔황 범씨 집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