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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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單道開생몰년도 미상
후조 및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양주(涼州) 돈황군(敦煌郡) 출신.
2. 생애
선도개는 항상 거친 베옷을 입고 다니면서 누군가가 비단옷을 선물해도 입지 않았다. 그는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낮이든 밤이든 잠을 자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늘 작은 돌들을 먹었는데, 한 번에 많거나 적게 몇 개씩 삼켜서 먹었다. 산에 사는 것을 좋아했으며, 산 속의 여러 나무신들이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후조의 무황제 석호 재위기에 서평(西平)으로 가, 하루에 700리를 걷기 시작하였다. 한 14살의 동자승이 선도개를 따라갔다. 선도개가 진주(秦州)에 이르러 상표한 후, 후조의 수도인 업(鄴)에 마침내 도착하니, 석호는 승려 불도징을 보내 그와 대화하게 하였으나, 불도징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후 선도개는 업성 서쪽에 위치한 승려 법침(法綝)의 사원에 머물다가, 후에 임장(臨漳)에 위치한 소덕사(昭德寺)로 옮겼다.
선도개는 사원에서 8~9척 높이의 중각을 지어, 그 위에 갈대로 좌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항상 앉아 있었다.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무제 석호는 선도개를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그는 석호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찾아와 질문해도 선도개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몇 개의 진정제를 복용했는데, 그 크기는 오동나무 씨만 하였다. 약은 소나무 꿀, 생강, 계피, 복령(伏苓)[1]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였으며, 때때로 차 한두 되를 마셨다. 그는 스스로 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그 효과를 보았다. 그의 행동을 보면 마치 신령한 기운이 있는 듯하였다. 이를 본 불도징이 말했다.
"이 도사는 나라의 흥망을 볼 수 있다. 그가 떠난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훗날, 석호 말기에 선도개는 남쪽으로 떠나 허창(許昌) 밑으로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성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승평 3년(359년), 선도개가 동진의 수도인 건강(建康)에 도착하였고, 이후 남해(南海)에 이르러 나부산(羅浮山)으로 들어갔다. 그는 홀로 초가집에서 살면서 속세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선도개는 100살이 넘도록 살다가 산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돌 구멍 안에 두라고 유언하였다. 이에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석실에 두었다.
진군(陳郡) 사람 원굉이 남해태수로 부임했을 때, 원굉은 동생 원영숙(袁穎叔)과 승려 지법방(支法防)을 대동하여 나부산을 올라가 선도개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석실 입구에 이르렀다. 이윽고 석실 안으로 진입한 그들은 선도개의 시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보이고, 향과 도자기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원굉은
"법사의 업적은 남다르니,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은 것 같구나."
라며 선도개를 찬탄하였다.[1] 한약재. 자세한 내용은 한약자원연구센터 내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