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8 13:10:37

사침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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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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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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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謝沉
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행사(行思). 양주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출신. 동오 시기 예장태수를 지냈던 사비(謝斐)의 증손자. 동오 시기 익정도위를 지냈던 사수(謝秀)의 아들.

2. 생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자 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경서와 역사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박학다식하였다. 장성하고 군(郡)에 임관하여 주부, 공조를 역임하다가, 효렴에 천거받고 태위 치감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회계내사 하충 밑에서 참군을 지내던 중 노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정서장군 유량(庾亮)과 정북장군 채모가 각자 사침을 자신의 공조, 참군으로 삼으려 했지만, 사침은 이를 전부 거절하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한가로이 살았다. 그는 밭을 일구면서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묘지와 관련된 서적을 면밀히 공부했다.

함강 8년(342년) 6월, 강제 사마악이 즉위하고, 조정에서 7묘가 여러 번 파괴된 것에 대해 의논하고자 사침을 태학박사로 초빙하고 그에게 왕조의 묘당과 관련된 일을 질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여 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사직했다.

상을 마친 후, 복직되어 상서탁지를 지냈다. 하충과 유빙(庾冰)이 사침을 가리켜 사관의 재능이 있다 칭찬하니, 이내 조정에서 그를 저작랑에 임명하였다. 사침은 저작랑에 재직하면서 ≪후한서≫(後漢書) 122권과 ≪진서≫(晉書) 30여 권을 집필하고, ≪모시≫(毛詩)와 ≪상서≫(尙書)에 주석을 달았다.[1] 이 외에도 ≪모시석의≫(毛詩釋義) 10권, ≪문장지록잡문≫(文章志錄雜文) 8권, ≪명사잡문≫(名士雜文) 8권 등 수많은 문집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은 그의 학문과 재능이 우예에 버금간다 평하였다.


[1] 다만 그가 지은 ≪후한서≫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청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집본이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그마저도 행방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