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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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潘京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세장(世長). 형주 무릉군(武陵郡) 한수현(漢壽縣) 출신.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군(郡)의 부름을 받고 주부에 임명되어 무릉태수 조흠(趙廞)에게 중용받았다. 이후 주(州)에 징소되어 자사를 알현하였는데, 이때 반경이 자사에게 지역을 다스릴 주된 정책에 대해 물었다. 자사는 "불효"를 바로잡는 것이 주된 목표라 답하고는 농담조로 말했다."벼슬살이 하는 그대는 혹시 불효자인가?"
이에 반경이 바로 답했다."지금은 충신인지라 다시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반경의 재치와 말솜씨는 모두 이와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수재로 천거받고 낙양에 이르러, 당대 이름난 현학자인 악광을 포함한 여러 선비들과 담론을 나눴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파구(巴丘), 소릉(邵陵), 천릉(泉陵) 3현의 현령직을 역임하고, 승진하여 계림태수에 임명되었으나 반경은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50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