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01:58:36

사혼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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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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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謝混
(? ~ 412)

동진의 인물로 자는 숙원(叔源). 동진의 유력 가문인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태부 사안의 손자이자 사공 사염의 아들이다. 장수로 활약했던 아버지와 달리 문인으로 활동했다. 아명은 익수(益壽).

2. 생애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고 글재주도 뛰어났다. 천성이 고고하여 사람들을 가려 사귀었고 사령운, 사회, 사요(謝曜), 사담(謝澹) 등의 친척들과 오의항(烏衣港)에 모여 살았다. 사혼이 성인이 되었을 무렵, 당시 자신의 딸 진릉공주와 혼인할 사윗감을 구하던 효무제가 왕순(王珣)을 불러 말했다.
"공주의 사위로는 유진장, 왕자경 정도만 되어도 족하다. 재주가 적고 부귀하기만 한 왕처중, 환원자과 같은 자는 진실로 집안에 들이고 싶지 않구나."
이에 왕순이 대답했다.
"비록 진장에 미치지 못하며, 자경에 비할 바 되지 않지만 사혼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효무제는 왕순의 말을 듣고 그 정도만 되어도 족하다며 사혼을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혼사를 나눠보기도 전에 효무제가 시해당했다. 원숭(袁崧)이 이 틈에 자신의 딸을 사혼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왕순이 그에게 경고했다.
"경은 금련(禁臠)[1]을 가까이 하지 마시오."
왕순의 경고를 새겨들은 원숭은 딸을 사혼에게 시집보내려던 계획을 관두었고, 사혼은 예정대로 진릉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다.

융안 4년(400년) 7월, 아버지와 형들이 손은의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바람에 사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망채현공(望蔡縣公)에 봉해졌다. 이때 환현이 사안의 옛 저택을 자신의 군영으로 삼으려 하자 사혼이 한탄했다.
"소백(召伯)의 인자함은 감탕나무에까지 미쳤는데, 문정(文靖)의 덕으로는 5묘(五畝)의 집조차 지킬 수 없단 말인가? "
환현은 이 말을 전해듣고 무척 부끄러워 하며 그만 두었다.

사혼은 중서령, 중령군, 상서좌복야를 역임하면서 본래 유유 쪽에 붙어있었으나 유유가 본격적으로 정권을 휘어잡으려 하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예주자사 유의와 함께 무리를 만들고 유유를 견제했다. 사혼은 유유가 양주자사에 임명되는 것을 방해했지만 유유의 측근인 유목지의 계책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사혼이 노골적으로 유유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니, 그의 사촌형 사담은 사혼 때문에 멸족될 것을 염려해 그때부터 그를 점차 멀리했다.

의희 8년(412년) 9월, 형주자사로 옮겨진 유의는 강릉(江陵)에 부임해 지방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고, 더이상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예주의 병력을 멋대로 빼앗아 자신의 군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얼마 안가 유의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니, 그의 무리는 유의 사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남만교위 치승시 등은 유의의 사촌동생인 연주자사 유번(劉藩)을 불러 만에 하나 유의가 잘못되면 유번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측근들의 설득에 넘어간 유의는 당시 태위를 지내던 유유에게 서신을 보내 유번을 자신의 부관으로 삼아줄 것을 청했다. 유유는 그의 청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유번이 입조하러 도성에 도착하자, 조서를 내려 유의 죄상을 나열하고 유의의 무리인 유번과 사혼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사혼의 봉국 또한 폐지되었고, 황족이자 사혼의 부인인 진릉공주는 차마 처형할 수는 없어 강제로 이혼시켜 사씨 집안과 관련없는 인물로 만들었다.

3. 기타

사혼의 풍류는 강동에서 제일 가기로 유명했다. 훗날 송나라가 세워지고 사혼의 친척인 사회가 유유의 즉위를 축하할 때, 유유는 사혼의 풍류를 후세에 남길 수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혼은 문인으로서 책도 여러 권 저술했는데 전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수서》와 《신당서》에 《문장류별본(文章流别本)》 12권과 《집원(集苑)》 60권을 남겼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다만 그가 남긴 시들은 보존되어, 고대 ~ 중세 중국 시들을 모은 시집 《선진한위진남북조시(先秦漢魏晉南北朝詩)》에 수록되어 있다.


[1] 돼지고기 목살 부위를 말한다. 원제가 건업에 막 도착했을 때, 공사가 모두 궁핍하여 먹을 것이 적었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사치스러운 육류였고, 그중에서도 목살은 특히 귀하게 여겨 대신들도 함부로 이를 먹지 않고 황제에게 진상했다. 이에 왕순은 사혼을 금련에 비유하며 황제의 것을 탐내지 말라 경고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