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02:15:28

조유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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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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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나헌등전(羅憲等傳)」
나헌 등수 마륭 호분 도황 오언 장광 조유
趙誘
(? ~ 317)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동진의 무장이며 자는 원손(元孫)으로 양주(揚州) 회남군 출신.

2. 생애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관을 지내며 명예를 떨쳤다고 한다. 조유는 주에서 발탁되어 주부로 관직에 처음 진출했다.

301년, 제왕 사마경이 제위를 찬탈한 조왕 사마륜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각지에 뿌렸다. 양주자사 치륭은 사마경에게 호응하자니 낙양에 있는 조카들이 혹여 연루돼 해를 입을까 걱정되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자니 사마경의 의심을 사서 토벌당할 것 같아, 이도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치륭은 양주의 모든 관원들을 소집해 이 일을 어떻게 할지 회의했다. 조유가 나서서 말했다.
조왕 사마륜이 찬탈하여 반역을 꾀하였으니, 이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현재 정의의 군대의 기세는 마치 광폭하게 솟구치는 것과 같아, 사마륜의 실패는 불 보듯 뻔합니다. 지금 자사님께서 몸소 정예병을 이끌고 허창으로 가서 연합군에게 호응하는 것이 상책이며, 홀로 영지에 남는 대신 맹장을 파견해 연합군과 동맹을 맺는 것이 중책입니다. 소규모 부대만을 보내 소극적으로 연합군을 돕는다면 이는 하책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치륭은 출병하지 않고 양주를 지킬 방법을 모색하니, 조유, 치중 유보(留寶), 주부 장포(張褒) 등이 출병해야 한다 설득했다. 부하들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치륭은 일이 실패하면 양주에 변란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머뭇거리기만 하던 치륭은 설득을 포기한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치륭이 죽은 후, 상관을 살해한 죄를 물을까 두려웠던 조유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낭야왕 사마예를 모시고 팔왕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도망가던 왕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 조유를 쓸만한 인재라 여겨 광무장군으로 삼았다. 조유는 사마예를 섬기며 311년에 감탁, 주방(周訪)과 함께 사마예에게 불복하던 강주자사 화일(華軼)을 토벌했다.

312년, 당시 촉땅의 유민인 두주(杜疇)가 난을 일으키자 상주자사 순조(荀組)가 파촉의 유민들을 모두 학살하려 했다. 유민들은 몹시 두려워 신망 높은 예릉현령 두도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니, 그 무리만 5만에 육박하였다. 정토도독 왕돈은 두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역양내사 감탁, 심양태수 주방, 무창태수 도간과 출병하였고, 조유도 이 원정에 종군하였다. 이후 3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왕돈은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했고 조유도 공을 인정받아 평아현후에 봉해졌으며, 도간의 후임으로 무창태수에 임명되었다.

315년 8월, 서진의 진민제가 파견한 안남장군 형주자사 제오의(第五猗)가 또다른 반란군 두증과 연합하여 사마예의 세력을 위협하였다. 사마예가 임명한 형주자사 도간은 적을 가볍게 보고 두증과 제오의를 쳤으나 적의 병력이 훨씬 많아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고, 대장군 왕돈은 도간이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광주자사로 좌천시켰다. 도간은 평소 인망이 높았으므로, 형주의 여러 관리와 장수들을 포함해 부장 정반(鄭攀), 마준(馬雋) 등이 도간의 유임을 청했지만 왕돈이 불허했다. 정반과 마준은 도간의 좌천 소식에 분하고 원통해하며 두증의 반군 세력과 합류해버린다. 이에 왕돈이 조유와 양양태수 주궤(朱軌)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하니, 정반은 두려워 항복하였다.

317년 9월 28일, 조유와 주궤는 이어서 두증을 토벌하라는 왕돈의 명을 받들어 능강장군 황준(黃峻)과 합류해 강릉군 여관호(女觀湖)에서 두증과 크게 싸웠으나 패배했다. 주궤, 황준 등 여러 장수들이 여관호 전투에서 전사했고 조유와 그의 아들 조공(趙龔)도 두증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왕돈은 조유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하며 정로장군, 진주자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마준 등이 두증을 배반해 그를 사로잡아 당시 토벌군을 진두지휘하던 주방에게 바쳤다. 주방은 두증을 무창으로 압송하려 했으나 조유의 뒤를 이은 차남 조윤(趙胤)과 주궤의 아들 주창(朱昌)이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두증은 이 둘에게 칼로 갈기갈기 찢겨져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조윤은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은 원한에 사무쳐 죽이는 것도 모자라 두증의 고기를 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