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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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龔玄之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은사. 자는 도현(道玄). 형주 무릉군(武陵郡) 한수현(漢壽縣) 출신. 장사상, 산기상시 공등(龔登)의 아들.
2. 생애
공현지는 과묵한 성격에 공부를 좋아하여 누추한 골목에 자리잡고 살았다. 주에서 그를 수재로 천거하고, 관청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효무제 사마요가 조서를 내려 공현지를 산기상시, 영 국자박사로 삼으니, 군현에서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공현지에게 출사를 다그쳤다. 그럼에도 공현지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병이 위독하다 주장하며 버텼다. 이후 효무제가 명령을 거두어 비로소 핍박은 멈추었으나, 오래지 않아 공현지는 사망하였다. 향년 58세.조카 공원수(龔元壽) 역시 덕과 지조가 있었지만, 고매한 뜻을 품고 벼슬에 임하지 않았다. 효무제가 누차 불러 태학박사, 산기상시, 급사중로 임명하려 했으나, 공현지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채 집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