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7 15:05:14

염찬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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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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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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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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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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閻纘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정사

1. 개요

서진의 관료이며 자는 속백(續伯)으로 익주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사람이다. 조부는 오두미교의 교주인 장로의 막료였던 염포이고 부친 염박은 서진의 삼국 통일 후 한중태수를 지냈다.

2. 정사

처음에는 황실의 첫 번째 관리인 양준의 후견인이었다가 안후의 명령으로 옮겨졌다.

영평 원년(291년) 양준이 가남풍 일당에게 살해당하자, 염찬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가산을 털어 양준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지냈다.

주손의 사제인 저잔은 그의 글을 뒷받침할 만큼 재능이 있다며 화교에게 그를 추천했는데, 화교는 "이 관직은 무거운 정부 부처가 아니며 귀족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인재를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화교는 염찬을 임명할 수 없었다.

용강 원년 4월, 조왕 사마륜이 장화, 배외, 해계, 해결 등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주살하자 면전에 비판했지만 사마륜은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중 태수를 지냈다가 재직 중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