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08 09:25:22

온선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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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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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羨
? ~ 30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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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장경(長卿)으로 병주 태원군 기현 출신. 위나라의 양주자사 온회의 손자이자 제남태수 온공(溫恭)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해 제왕 사마유의 부름받고 그 휘하에서 일하다가 상서랑이 되었다. 혜제가 즉위하자 예주자사가 되었고 이후 중앙으로 들어가 산기상시와 상서를 역임하였다.

301년, 사마유의 아들인 제왕 사마경이 황위를 찬탈한 사마륜을 물리치고 정권을 손에 넣었다. 사마경은 아버지 밑에서 일한 온선을 각별히 아껴, 그를 이부상서에 임명하고 항상 가까이 했다. 사마경이 사마륜에게 살해당한 장화를 복권시키는 일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했는데, 어떤 이가 장화는 사마휼의 폐위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가남풍의 전횡을 도왔다며 반대하자 온선이 반박했다.
천자 이하 간관(諫官)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돌려서는 안됩니다. 안자께서 이르시길, '남을 위해 죽는 것은 그와 친한 사람이 아닌 이상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으며, 대부 이극(里克)이 여희의 두 아들을 죽인 일과 한나라에서 여씨를 축출할 일 모두 난리가 있은 뒤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태자가 폐위되고 고작 수 개월 안에 일을 도모해 바로잡을 수 있는 자는 사실상 없을 것이며 또, 장화는 식건전(式乾殿)에서 이에 대해 간언한 바 있습니다. 허나, 재상이 불화하여 모든 대신들이 대세를 따라 순응할 수 밖에 없었으니, 장화가 이들을 지휘해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황후 가남풍은 태자를 모함해서 폐위시켰을 뿐, 내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 황후가 비록 태자를 모함했어도 이는 반역죄에 해당되지는 않아 예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장화가 태자를 모함한 황후 가남풍을 폐위시키지 못했다며 지금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과거 조돈이 임금을 죽인 조천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며 그를 폄하하고 비하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사마경은 또한 온선의 말을 옳게 여겨 장화는 복권될 수 있었다.

305년, 성도왕 사마영 토벌에 공을 세워 대릉현공에 봉해지고, 식읍 1800여호를 받았다. 이후 기주자사, 후장군이 되었으나 얼마 안가 범양왕 사마효에게 기주자사직을 빼앗기니, 온선은 항상 사마효를 피해 도망다녔다.

동년 11월, 혜제가 장방을 피해 장안으로 피신했을 때 중서령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들어갔으며, 306년에 혜제가 낙양에 귀환한 뒤 중서감이 되고 산기상시를 더하였으나, 조서를 받기도 전에 혜제가 급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회제는 온선을 좌광록대부, 개부, 영사도로 고쳐 임명하니, 사람들은 그가 너무 빨리 승진했다며 의아해 했다.

307년 초, 승진한지 몇 개월 안지나서 병으로 사망하였고, 사도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원(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