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22:15:59

공손영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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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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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公孫永
생몰연도 미상

전진의 은사. 자는 자양(子陽). 유주 양평군(襄平郡) 출신.

2. 생애

공손영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마음이 평온하여 욕심이 없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하지 않은 채, 곽평(平郭)의 남산(南山)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밭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였고, 바위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부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나이는 90여 세에 이르렀음에도 성품과 행동은 젊었을 적과 변함이 없었다.

또다른 은사인 공손봉과 더불어 전연의 황제 모용위의 초청을 받아 업(鄴)으로 갔다. 공손영은 모용위를 알현하고도 절을 하지 않았고, 왕공 이하의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도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공손영은 1년 동안 업에 거주하면서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한파를 몸소 경험했음에도, 그의 바르고 정돈된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이후 미친 척을 하고 모용위의 눈을 속여 다시 곽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선소제 부견이 예를 갖추어 공손영을 초빙하려 하였다. 부견은 정식으로 초빙하기 전에 공손영이 노쇠한 것을 고려하여 일단 사신을 보내 그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공손영이 먼저 사망하였고, 부견은 이를 심히 안타깝게 여겨, 공손영에게 "숭허선생(崇虛先生)"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