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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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遐(? ~ 326)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자는 정장(正長). 기주 광평군(廣平郡) 역양현(易陽縣) 출신. 기주자사 소속의 사위.
2. 생애
과감한데다 의연한 성격으로 사람됨이 막힘 없이 시원시원하고 용감했으며,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다. 영가의 난으로 인해 서진이 대혼란기에 빠질 무렵, 유하는 오주(塢主)가 되어 매일 같이 쳐들어오는 도적을 격파하고, 본인이 직접 선두에 서서 본거지를 함락시키니, 기주 사람들은 그를 장비, 관우에 비견된다며 칭송했다. 동향인인 기주자사 소속은 그의 기량이 심오한 것을 보고, 자신의 딸을 유하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황하와 제수(濟水) 사이에서 강을 틀어막고 지키자, 도적들은 감히 접근할 생각조차 못했다.건흥 4년(316년) 12월, 건강(建康)에 자리를 잡은 낭야왕 사마예가 사신을 보내 유하에게 절도(節度)를 하사하고, 책서로 그의 공을 표창하면서 용양장군, 평원내사에 임명했다.
건무 원년(317년), 원제가 조서를 내려 명했다.
유하는 충성과 용기와 과감한 결단력이 있고, 그의 의로움과 정성 또한 가히 칭찬할 만하다. 그리하여 유하를 하비내사에 임명하고, 장군직은 이전과 같게 하라.
대흥 원년(318년) 12월, 당초, 패군(沛郡) 출신인 주무(周撫)는 영가의 혼란기를 기회로 삼아, 같은 군 출신의 주묵(周默)과 더불어 각자 보루를 세우고 오주에 올라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주묵이 조적에게 투항하자 주무는 노하여 주묵을 습격해 살해하고는 팽성(彭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조의 석륵에게 투항했다. 이에 동진 조정은 조서를 내려, 유하를 영팽성내사(領彭城內史)로 삼고, 서주자사 채표, 태산태수 서감과 함께 주무를 토벌하도록 했다.
대흥 2년(319년) 2월, 유하 등은 팽성 동북쪽에 위치한 한산(寒山)에서 주무의 반란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했다. 주무는 단기로 도망치다가 서감의 부하인 우약(于藥)에게 사로잡혀 참살당했다. 원제 사마예는 유하의 공을 치하하고 임회태수로 삼았다. 이때 서감은 자신의 부하가 적의 수장을 죽였음에도 공적 순위가 유하보다 뒤처지는 것에 분노하여 태산을 들어 후조에 투항하고, 스스로를 안북장군, 연주자사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동진 조정에서는 또다시 토벌군을 편성해 정로장군 양감을 총대장으로, 유하, 채표 등을 보내 서감을 토벌하라 명했다.
대흥 4년(321년) 2월, 서감이 반란을 포기하고 다시 동진에 항복했다. 그렇게 반란이 종결되자, 유하는 북중랑장, 연주자사로 옮겨졌다.
태녕 2년(324년) 정월, 후조의 장병도위 석첨(石瞻)이 군대를 나누어, 하비와 팽성 등지를 침략하고 동완(東莞)과 동해(東海)를 함락시켰다. 유하는 석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사구(泗口)로 물러났다.
태녕 2년(324년) 6월, 왕돈이 재차 반란을 일으키자, 상서령 치감은 명제 사마소에게 유하와 임회태수 소준을 수도로 불러들여 왕돈의 반란군을 막게 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명제는 조서로 유하, 소준, 예주자사 조약, 서주자사 왕수(王隨), 광평태수 도첨(陶瞻)을 징소해, 군대를 이끌고 건강으로 와서 황제를 보위하라 명했다. 유하는 신속히 군사를 발동하여, 소준과 정예병 10,000여명을 거느리고 건강에 도착한 뒤, 야밤에 명제를 알현했다. 이후 소준과 함께 왕돈의 심복들인 심충과 전봉(銭鳳)을 남당(南塘)에서 격파하고, 청계(靑溪)에서 심충을 다시 한 번 더 격파했다. 그 무렵, 왕돈의 본대를 이끌고 동진군과 대치하고 있던 왕함(王含) 등은 왕돈의 병사 소식에 놀라 군영에 불 지르고 야반도주했다.
유하는 단양윤 온교의 지휘 아래에서 도망친 왕함과 전봉을 쫓아 강녕(江寧)에 이르렀다. 이때 유하가 자못 방종하여 병사들의 자국민 약탈을 방치하자, 온교가 이를 질책하며 말했다.
"천도(天道)가 순리를 도와 왕함을 마침내 멸할 수 있었는데, 혼란을 틈타서 또다른 혼란을 야기하지 말도록 하라."
유하는 깊이 반성하며 온교에게 절을 하고, 사죄를 구했다. 태녕 2년(324년) 10월, 왕돈의 잔당이 모두 평정된 후, 유하는 공을 인정받아 천릉공(泉陵公)에 봉해지고, 산기상시, 감회북제군사(監淮北諸軍事), 북중랑장, 서주자사, 가절에 임명되어 회음(淮陰)을 진수했다.
함화 원년(326년) 6월 5일[1],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그를 안북장군으로 추증하였다. 그의 아들 유조(劉肇)가 작위를 계승했고, 관직은 산기시랑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유하의 후손들은 계속 작위를 세습하다가, 유유의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봉국이 삭제되었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