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2:51:07

사상(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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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함정간후(咸亭簡侯)
謝尙 | 사상
시호 (簡)
작위 함정현후(咸亭縣侯)
(謝)
(尙)
인조(仁祖)
생몰 308년 ~ 357년 6월 14일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부모 부친 - 사곤(謝鯤)
배우자 원여정(袁女正)
자녀 사승요(謝僧要), 사승소(謝僧韶) 외 딸 1명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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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인조(仁祖). 진군 사씨 집안 출신으로, 예장태수 사곤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재치가 뛰어났다고 한다. 7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이 세상을 떠났는데, 사상이 상 중에 예법 이상으로 애통한 감정을 드러내니, 친척들은 모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또, 한번은 아버지 사곤이 손님을 위해 송별회를 열었을 때, 당시 8세이던 어린 사상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때 어떤 이가 사상을 가리켜 말하길,
"이 아이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안회와 같도다."
라 하였다. 그러자 사상이 그 자를 향해,
"좌중에 니부(尼父)가 없는데 어찌 안회를 알아볼 수 있는가!"
라 하니,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10여 세에 이르렀을 무렵, 아버지 사곤이 병으로 사망했다. 슬픔에 겨워 크게 울부짖던 사상은 명망높은 명사인 단양윤 온교가 조의를 표하기 위해 찾아오자, 이내 눈물을 닦고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온교는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가 다른 아이들과 무척 다른 것을 보고 심히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후 성인이 된 사상은 전보다 더욱 총명해졌고, 사리분별력이 절륜했으며, 소탈한 성격으로 세세한 것을 신경쓰지 않아 세속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꽃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바지를 즐겨 입었는데, 집안 어른들의 책망을 듣고 이를 바로 그만두자 명성이 높아졌다. 음악적 감각도 매우 뛰어나 다양한 기예에 통달했고 춤도 잘 추기로 유명했다. 사도 왕도는 사상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에 비견된다며 그를 중시하고 자신의 사도부 속관으로 들였다. 이후 서조속(西曹屬), 회계왕우(會稽王友), 황문시랑, 건무장군, 역양태수, 독강하의양수삼군군사(督江夏義陽隨三郡軍事), 강하상(江夏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함강 6년(340년) 정월, 사상은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형주자사 유익과 수 차례 만나 군사 업무에 관해 논의했다. 어느 날, 사상은 유익과 만나 함께 사격 훈련을 했는데, 유익이 사상에게 말하길,
"경이 만약 저 과녁을 맞추면 상으로 고취(鼓吹)를 선물하겠네."
라 하였다. 이에 사상이 활을 들어 과녁 한복판을 정확히 명중하니, 유익은 곧바로 고취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사상은 지역을 다스리면서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했고, 정사를 간편하게 처리했다. 한번은 그가 군에 새로이 부임했을 때, 해당 군의 관리들은 사상을 맞이하기 위해 40필의 천으로 오포장(烏布帳)을 만들어 관사를 꾸몄다. 이를 본 사상은 오포장을 전부 허물고, 그 천으로 병사들의 저고리와 바지를 만들게 했다.

건원 2년(344년) 11월, 강주자사 유빙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사상을 영강주자사, 남중랑장으로 삼는 동시에, 기존에 다스리던 예주의 4군은 그대로 통치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중랑중, 독양주지6군제군사(督揚州之六郡諸軍事), 예주자사, 가절로 옮겨지고 역양에 진수했다.

영화 7년(351년) 8월, 염위의 한족 군주 염민의 장수였던 장우가 투항해왔지만, 사상이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아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영화 8년(352년) 3월, 양주자사(揚州刺史) 은호가 조정에 표를 올려 북벌을 청했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이를 허락하니, 은호는 사상을 안서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수양(壽陽)으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이때 일전에 투항해왔던 장우가 허창(許昌)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우가 장수 상관을 보내 낙양을 치게 하고, 낙홍을 보내 창원(倉垣)을 치게 하자, 은호의 북벌군은 길이 막혀 전진할 수 없었다.

영화 8년(352년) 5월, 은호의 북벌군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가운데, 전진에게 패하고 도망치던 강족 요양이 자신의 동생 5명을 인질로 보내며 동진에 귀순했다. 동진에 투항한 요양은 사상을 만나볼 심산으로 단기로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갔다. 사상은 요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호위병을 물러가게 하고, 두건을 쓴 채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서로 친목을 다졌다.

영화 8년(352년) 6월, 사상은 요양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장우를 쳤다. 사상의 공세를 받고 이내 위태로워진 장우는 전진의 경명제 부건에게 서신을 보내 급박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부건은 승상 부웅, 평창왕 부청에게 20,000 군사를 주어 허창을 구원하게 했다. 사상은 명장 부웅의 전술에 휘말려 계교(誡橋)에서 대패해 15,000명의 병력을 잃고 회남으로 도주했다. 후방에서 보급을 맡고 있던 요양은 패전 소식에 치중을 모두 버리고 사상을 맞이해 작피(芍陂)까지 호송했다. 작피에 도착한 사상은 요양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도성 건강(建康)으로 들어가 정위(廷尉)에 출두하여 자신의 처분을 기다렸다. 당시 어린 목제 사마담을 대신해 섭정하던 강헌황태후 저산자는 사상의 조카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특령을 내려 사상을 건위장군으로 강등하는 데에 그쳤다. 사상은 처분을 받은 후 다시 수양으로 돌아갔다.

영화 8년(352년) 8월, 염위의 수장 염지가 사신 유의를 보내 전국옥새를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동진에 구원을 청했다. 동진의 건무장군 대시는 유의를 붙잡아 전국옥새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고, 이후 참군 하융을 업성(鄴城)으로 보내 염위의 대장군 장간을 속여서 전국옥새를 탈취했다. 하융이 전국옥새를 들고 방두(枋頭)로 달아나니, 사상은 진무장군 호빈에게 기병 300을 주고 방두로 보내 전국옥새를 영접하게 했다. 이리하여 전국옥새는 무사히 건강(建康)으로 옮겨졌다.

영화 8년(352년) 10월, 사상이 관군장군 왕협을 파견해 전진의 장수 양평을 격파하고 허창을 함락시켰다. 동진 조정에서는 사상을 징소해 급사중으로 삼고, 초거(軺車), 고취를 하사한 뒤, 석두성을 지키게 했다.

영화 9년(353년) 4월, 상서복야에 임명되었다.

영화 10년(354년) 정월,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사상을 도독강서회남제군사(都督江西淮南諸軍事), 전장군, 예주자사, 급사중에 다시 임명하고, 상서복야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역양을 지키게 했다. 또, 예주양주지오군군사(都督豫州揚州之五郡軍事)가 더해지니, 사상은 재임 중 상당한 정치적 공적를 거두었다.

영화 10년(354년) 5월, 환온이 제1차 북벌 나간 틈을 타, 강서 지역의 유민 곽창이 진류내사 유사를 사로잡고 요양에게 항복했다.[1] 동진 조정이 크게 놀라 불안에 떠니, 사상은 수양에서 내려와 건강 인근을 순시하며 수도를 보위했다.

영화 12년(356년) 9월, 환온이 제2차 북벌에 성공하고 낙양을 재탈환했다. 환온이 조정에 상표하여 사상을 도독사주제군사(都督司州諸軍事)로 삼아주길 청하고, 그로 하여금 낙양을 지키게 하려 했으나, 사상은 병에 걸려 가지 못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단양윤 왕호지를 보내 사상을 대신하게끔 했다.

승평 원년(357년), 예주, 기주, 유주, 병주 4주의 도독으로 승진하고, 위장군,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나, 사상의 병환은 나아질 기미는 커녕 더욱 위독해져만 갔다. 결국 그 해 5월 11일[2], 부임지인 역양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향년 50세. 시호는 간(簡).

사상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작위는 사촌동생 사혁이 이었으며, 사상의 세 딸들은 모두 동진의 명문가 자제에게 시집갔다.


[1] 요양은 은호의 지나친 견제로 인해 동진을 배반했다.[2] 양력으로 계산할 시, 6월 14일.